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일찍이 정미년(1907)부터 의병활동을 시작하여 계속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대구(大邱)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그는 1915년 우재룡(禹在龍)·양제안(梁濟安)·김한종(金漢鍾)·엄정섭(嚴正燮)·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제휴하여 조직한 혁명단체였다. 동회는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경북 경주(慶州)에서 영덕·영일 방면의 우편차를 습격, 일제가 수탈한 세금 8천 7백원을 탈취하여 대한광복회의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비밀활동을 수행하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일경에 붙잡히자, 그는 한 훈(韓焄)·우재룡 등과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만주로 탈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인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방면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해 가며 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제 고관의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귀국한 그는 1919년 음력 8~9월경 우재룡·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과 안종운(安鍾雲)의 집에 모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독립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 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논산(論山)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으며 권영만은 논산의 부호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그후 이들은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1920년 음력 2월 동지인 장응규(張應圭)를 상해에 파견하였다.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할 것을 의뢰받고 귀국하여 동년 음력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沈永澤)을 단장으로 주비단을 결성하였다. 권영만도 이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50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2·4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105면
- 고등경찰요사 204·205·264·27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57·3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