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43
성명
한자 權寧萬
이명 覺軒(號)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907년 의병운동 참가(義兵運動參加), 1913년 광복단(光復團) 조직(組織) 참모장(參謀長), 군자금 모집(軍資金募集),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밀령(密令)으로 총독부(總督府) 수뇌(首腦) 암살(暗殺) 계획(計劃)피체(被逮)되어 8년간(年間) 복역(服役)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일찍이 정미년(1907)부터 의병활동을 시작하여 계속적으로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대구(大邱)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그는 1915년 우재룡(禹在龍)·양제안(梁濟安)·김한종(金漢鍾)·엄정섭(嚴正燮)·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제휴하여 조직한 혁명단체였다. 동회는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경북 경주(慶州)에서 영덕·영일 방면의 우편차를 습격, 일제가 수탈한 세금 8천 7백원을 탈취하여 대한광복회의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비밀활동을 수행하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의 동지들이 일경에 붙잡히자, 그는 한 훈(韓焄)·우재룡 등과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만주로 탈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인해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만주방면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해 가며 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제 고관의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후 귀국한 그는 1919년 음력 8~9월경 우재룡·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과 안종운(安鍾雲)의 집에 모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및 독립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 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논산(論山)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으며 권영만은 논산의 부호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그후 이들은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1920년 음력 2월 동지인 장응규(張應圭)를 상해에 파견하였다.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국내에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할 것을 의뢰받고 귀국하여 동년 음력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沈永澤)을 단장으로 주비단을 결성하였다. 권영만도 이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계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50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2·45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105면
  • 고등경찰요사 204·205·264·27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57·34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영만 호 각헌(覺軒) 경북 영양(英陽) 1915년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 1920년 주비단군자금모집사건
본문
1878년 1월 17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도계리(道溪里)에서 권인환(權寅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각헌(覺軒)이다. 영양군 입암면(立巖面) 병곡리(屛谷里)에서 거주하다가 1922년 청송군 진보면(眞寶面) 광덕리(廣德里)로 이주하였다. 1907년 아버지 권인환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다. 1915년 7월 15일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김한종(金漢鍾)·정운일(鄭雲馹)·양제안(梁濟安) 등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고, 지휘장(指揮長)에 취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무장투쟁 노선을 표방하였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을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무력 준비·무관 양성·군인 양성·무기 구입·기관 설치·무력전’ 등의 투쟁 강령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우선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경주에서 우편 마차를 습격하여 8,700원을 탈취한, 이른바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을 주도하였다. 우재룡과 함께 일제가 영덕·영일 방면에서 거둔 세금을 운송하던 우편 마차를 경주에서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12월 24일 환자로 가장하여 우편 마차 주인집에 숙박하고, 대구의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핑계를 내세워 우편 마차에 동승하였다. 우재룡은 경주 광명리(光明里)의 효현교(孝峴轎)를 파괴하였다. 우편 마차가 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세금 8,700원을 탈취하여 경주 녹동(鹿洞) 박상진 집으로 귀환하였다. 이 사건은 대한광복회 본부에서 최초로 실행한 군자금 모집이고, 관련 정보는 재무부장 최준(崔浚)이 입수하여 제공하였다. 이후 대한광복회는 1917년 11월 경북 칠곡에서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고, 1918년 1월 충남 예산에서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는 의거를 실행하였다. 1918년 1월부터 대한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다수 회원이 체포되면서 그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한훈(韓焄)·우재룡 등과 만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만주 방면에서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지자, 1919년 6월 우재룡·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 등과 함께 충청도 일원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19년 8~9월경 충남 논산에 있는 안종운 집에 모여 전국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임시정부 및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명의의 「군자금 모집 요구장軍資金募集要求帳」 19통을 작성하여 충남 논산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논산의 부호 김재엽(金在燁)·김유현(金裕鉉)으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 요원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2월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해 장응규(張應圭)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였다. 장응규가 1920년 5월 임시정부에서 가지고 온 「주비단규칙서(籌備團規則書)」에 의거하여, 6월 서울 경신학교(敬信學校)에서 결성한 주비단(籌備團)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주비단은 임시정부 지시에 의해 조직된 임시정부 지원 단체였다. 단장은 심영택(沈永澤), 부단장은 안종운이었다. 주비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공채(公債)를 부호들에게 교부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서로군정서의 김좌진(金佐鎭)과 연락하면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본인 고관 처단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 활동 중 1920년 6월 27일 임시정부의 주비단군자금모집사건(籌備團軍資金募集事件)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21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계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공갈 취재(取財) 강도미수 살인강도 교사 등의 혐의로 동료 14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1922년 3월 30일 징역 10년 구형, 4월 13일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다.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겪고 1927년 9월 10일 출옥하였다. 광복 후 1945년 9월 조병옥(趙炳玉)·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임시정부와 연합군환영준비회(聯合軍歡迎準備會)를 조직하고 경호부에서 활동하였다. 12월 27일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였는데, 총무국장을 맡아 회장 이종태(李鍾台)·부회장 우재룡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7년 김구(金九)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독당(韓獨黨)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부를 맡았다. 1948년 4월 민주독립당 조직부 비서를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공갈취재, 강도미수, 살인강도교사 당지방법원 공판에 부침 경성지방법원 1921-12-2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강도, 공갈,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8년 경성지방법원 1922-04-1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공원 대한광복단 기념공원 경상북도 영주시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권영만(관리번호:243)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