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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42
성명
한자 郭鍾海
이명 郭寧宇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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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20. 8월 현풍청년회(玄風靑年會) 회장(會長)으로 있으면서 임정특파원(臨政特派員) 이현수(李賢壽)와 함께 항일 문서(抗日文書) 배포(配布), 삐라 살포(撒布)독립공채(獨立公債) 모집(募集)에 적극 활동하고 와싱톤회의시(會議時)는 외국인 선교사를 통하여 독립청원을 하며 독립운동 선전을 하는 등의 2년 5개월간(個月間)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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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그는 1920년 7월 3일 고향에서 백여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현풍청년회(玄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동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동년 8월 10일경 임시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李賢壽)가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경고문·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자유신보(自由申報)·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납세거부서·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휴대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이현수를 도와 이 문서들을 복사한 후 1921년 2월말에 이르기까지 서장환(徐章煥)·정팔진(丁八鎭)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의 관공리·부호들에게 우송하는 한편 대구시내 상점과 도로상에 살포하였다. 이들은 다시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永川郡),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 박기석(朴奇石)을 안동군(安東郡)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삼고 안동·영천·대구·경주지방의 관공서와 도로상에 이 문서들을 살포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또한 이들은 일제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1923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구·평양·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우송하고 워싱턴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23년 1월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45년 봄에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神社)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212∼21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6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곽종해 곽영우(郭寧宇) 경상북도 달성(達城) -
본문
1891년 2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玄風面) 중동(中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곽영우(郭寧宇)이다. 1920년 8월 경북 달성군에서 조직된 현풍청년회(玄風靑年會)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다수의 청년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현풍 지역 유지인 곽정곤(郭正坤)·김태원(金太元)·김윤규(金潤奎)·김문기(金汶基)와 함께 현풍청년회를 발기하였고, 1920년 8월 초 현풍공립보통학교(玄風公立普通學校)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되었다. 현풍청년회는 회장과 총무, 서무부(庶務部)·재무부(財務部)·풍속부(風俗部)·친목부(親睦部)·체육부(體育部)와 간사(幹事)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야학 활동에 주력하였다. 1921년 9월 20일 현풍면 하동(下洞)에 노동 야학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경북 지역에서도 초창기에 설립된 것이다. 현풍청년회 발기인이었던 김윤규와 김태원이 각각 노동 야학의 회장과 부회장을 맡을 정도로 힘을 쏟아 1922년에는 70여 명의 노동 학생을 수용할 정도의 규모가 되었다. 현풍청년회를 통해 문화운동을 주도해 오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현수(李賢壽)를 만나 함께 활동을 펼쳤다. 이현수는 독립공채 증권, 달성군 등지의 공채모집위원 사령장, 경북교통사무특파원(慶北交通事務特派員) 사령장을 가지고 1920년 8월경 귀국하였다. 그를 도와 「경고문」, 「독립공채모집 인정서」, 「납세거부서」, 『자유신보』 등을 인쇄하고 배포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 자금 확보에 노력하였다. 또한,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永川郡),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 박기석(朴奇石)을 안동군(安東郡)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삼아 영천·안동·대구·경주 등지에 인쇄한 문서를 배포하였다. 이후 이현수는 1921년 11월 열린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 일제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알려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독립청원서」를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 거주 미국인 의사에게 우송하였다. 또한 『자유지(自由志)』를 인쇄하여 언론사와 국내 각지에 보내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이현수를 추적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그와 함께 한 활동이 드러나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대구지검에 체포되었으나 1923년 1월 29일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석방되었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1945년 봄 현풍면의 신사(神社)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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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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