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7·619면
관리번호 | 23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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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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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英一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본적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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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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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박영일 | - | 평북 의주(義州) | - | |
본문 |
1924년 9월 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에서 태어났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한국광복군 징모 제6분처를 통해 입대하여, 광복군 제3지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한국광복군 제3지대는 창설 초기 편제상으로만 조직되어 있다가, 1942년 4월 징모처 제6분처라는 이름으로 김학규(金學奎)를 지대장으로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阳)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푸양은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있는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한 곳으로, 적후에서 초모공작을 전개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 특히 1944년 일제의 한인 학도병 강제 징집으로 많은 일본군 내 한적사병들이 중국으로 끌려오면서 전선을 근거리에 둔 징모 제6분처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 무렵 초모공작의 성과로 대원 수가 증가함에 따라 1945년 징모 제6분처는 광복군 제3지대로 개편되었다.1945년 초반 베이징의 일본군 헌병대 군속으로 있었다. 이즈음 광복군 징모 제6분처 소속으로 톈진(天津)과 베이징 지역에서 활동하던 함세만(咸世萬)의 광복군 초모에 연결되어 이종금(李鍾金)·이인곤(李仁坤)·조동빈(趙東彬)·정수정(鄭守貞)·이길영(李吉永) 등과 함께 광복군에 합류하여 제3지대 대원이 되었다. 광복 이후 광복군 제3지대는 적 점령 지구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고, 귀국을 지원하기 위한 대책마련에 나섰다. 이에 난징(南京)을 비롯한 카이펑(開封)·지난(濟南)·칭다오(青島) 등에 특파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박영준(朴英俊) 단장과 함께 허난성(河南省) 카이펑 지구 특파단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하였으나, 1949년 허리 부상 등으로 전역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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