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186
성명
한자 閔泳魯
이명 岩本泳魯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6 훈격 대통령표창
연희전문학교(延喜專門學校)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부터 경성(京城)에서 윤주연(尹柱淵)·서영원(徐泳源) 등과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하여 독립선언과 학생봉기를 계획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4년 1월 일군(日軍)징병(徵兵)되어 미얀마에서 근무하다가 탈출한 후 연합군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피살당하였다고 하나 객관적인 자료에서 활동내용과 사망경위가 확인되지 않음.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민영로는 1939년 12월 서울 연희전문학교 재학중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조직하여 독립선언과 학생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1939년 4월 7일, 연희전문학교 상과(商科) 본과(本科) 1학년에 입학하고, 12월에 동교생들과 조선학생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남한산성·냉천동약수터·연희전문학교 뒷산·벽제관 등 각지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기르는 한편 동지규합 및 조직 확대 등 독립운동의 방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들은 국내 학생과 동경 및 해외 유학생 등과 힘을 합해 13도청 소재지 및 중요 도시 중학교에 세포를 조직하여 3.1운동처럼 거국적으로 거사하기로 하고, 독립선언문의 작성과 임무·담당 등 밀약하였다. 거사 일자를 1942년 3월 중으로 정하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해 삐라를 뿌리며 서울로 합류하며, 동경 히비노(日比野) 공원의 거사도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각자 국내의 유지들과 미국유학생과도 연락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자, 겨레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자, 상부상조 우정을 혈맹으로 두터이 하자, 끝까지 일치단결하여 항일투쟁을 행동화 하자, 최후일각까지 절대 비밀 고수하자’ 등 5개 행동 강령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1941년 9월 3일, 서울본부 및 동경유학생동지회대표 등이 붙잡히고, 민영로는 9월 5일에 체포되면서 차례로 각도 조직망이 붕괴되었다. 그는 1941년 9월 16일부로 퇴학을 당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學籍簿(延喜專門學校)
  • 緬甸方面軍籍下師團留守名簿(1948. 12. 10)
  • 臨時陸軍軍人居(槐山面長:1945. 3. 1)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민영로 - 충북 괴산(槐山) -
본문
1919년 2월 20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괴산읍 서부리(西部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2월 22일 출생했다는 기록도 있다. 창씨명은 암본영로(岩本泳魯)이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재학 중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1939년 4월 7일 연희전문학교 상과(商科) 본과(本科) 1학년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 서울 사직동(社稷洞)에 있던 도정궁(都正宮)에서 동교생(同校生) 김상흠(金相欽)·서영원(徐泳源)·윤주연(尹柱淵)·김재황(金在璜)·이동원(李東元) 등과 도쿄 유학생 대표 백재호(白在鎬) 등 4명과 함께 항일결사인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국내의 주요 도시를 비롯해 도쿄 등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도 하부조직을 구축하고자 하였다.조선학생동지회에서는 1919년 만세운동과 같은 방식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여 1942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국내외에서 일제히 「조선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 사이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서대문구 냉천정(冷泉町)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경기 고양의 벽제관(碧蹄館) 등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지면서 항일의식을 굳건히 하였는데, 여기에 참여하여 동지 규합과 조직 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거사 계획을 준비하는 활동을 함께하였다.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1941년 7월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元山商業學校) 조직원이 연락을 위해 서울로 오다가 일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조직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9월 중순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함흥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같은 해 12월 17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3년 3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 400일 통산)을 받았다. 연희전문학교는 1941년 9월 16일 부로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해 무기휴학’한 것으로 처리하였다.출옥 후 일제에 의해 징병되어 1944년 1월 20일 부로 현역 이등병으로 일본군에 입영하였다. 마지막 행적은 1945년 1월 11일 부 통신까지 확인되는데, 당시 미얀마에 있는 삼18702병((森)18702(兵)) 부대 모리모토대(森本隊)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후의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미얀마방면군적하사단유수명부(緬甸方面軍籍下師團留守名簿)」(1948. 12. 10)에 의하면 ‘소식불명’으로 처리되어 있다. 집안에서는 조선학생동지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이동원(李東元·李世民)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하여 연합군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피살당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민영로(관리번호:218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