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7년
3. 1909년 2월 1일 부하
4. 1909년 4월 20일 부하 100여명을 거느린
5. 1910년 음력 2월 8일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박도경의 본관은 밀양이고 대대로 모양(牟陽, 지금의 高敞)에서 살았다. 박준식(朴準植)의 아들로 한미한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평시에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늘 말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방안에서 죽는다면 그 위인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하였다. 당시 모양현(牟陽縣)의 무기고에 좋은 포(砲)가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성재에게 알리니 당시 문수사(文殊寺)에 주둔하고 있던 의진을 이끌고 모양현을 내습하였다. 이때 박도경은 현내의 동지들과 내응하여 창고의 무기를 모두 꺼냈다. 적과의 접전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하였으나 의진의 희생은 34명이나 되었다. 훈련되지 않은 의진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박도경은 그 뒤를 따라 무기를 거두어 감추었다가 군사가 모이는 날에 비밀히 기별하여 운반해 가게 하였다.
당시 박도경은 성재 의진에서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전수용(全垂庸)·김치곤(金致坤)·박영건(朴永健)·정원숙(鄭元淑)·성철수(成喆修) 등과 더불어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통령(統領)에 김용구(金容球), 참모에 김엽중(金燁中)·김수봉(金樹鳳)이 임명되었다. 박도경은 이들과 함께 전남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성재 의진은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장성(長城) 등지에서 위세를 떨쳤다. 1907년 9월 영광(靈光)에서는 포대(砲隊, 砲射隊長)로서 활약하였다. 그후 몸소 천자포(千字砲)를 휴대하고 대원들을 지휘하여 광주(光州)·담양(潭陽)·순창(淳昌)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의병장 기삼연이 광주에서 순국한 뒤, 박도경은 격문을 돌리고 김공삼(金公三)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본진(本陣)을 세우고 스스로는 포사장(砲士將)이 되고, 김공삼은 선봉, 김일문(金一文)을 포장(砲將)으로 임명하고 의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성재의 의진은 주요 의장들에 의하여 나뉘어 지휘되었기 때문에 의진의 의기가 다소 감소되는 듯하였다. 이에 김공삼과 의논하여 여러 진을 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김영엽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합진하기를 청하였다. 이들은 광주를 습격하여 성재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에 김영엽이 유종여 등에게 피살되었다. 박도경은 군사를 거느리고 손룡산(巽龍山)으로 들어가 하수인 2인을 잡아서 죽일 수 있었으나 유종여는 놓쳐 버렸다. 군사를 이끌고 다시 장성으로 돌아와 군사를 교련하면서 그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동안 성재 의진에서 함께 활약하던 김준(金準) 등이 광주 어등산에서 순국하는 등 점차 형세가 어려워져 갔다.
1909년에 가서 그의 의진의 규모는 다소 확대된 듯하다. 1909년 2월에 체포된 부하 박이일(朴爾日)이 체포된 후 공술(供述)한 바에 의하면 "부하는 110명이고, 선봉장 이도운(李道云), 중군장 손도연(孫道演), 도십장 구연역(都十將 具連譯)과 좌우익장 및 참모를 거느렸다." 고 한다. 무기는 총 139정, 칼 24본 등으로 의진 중에서 비교적 무력이 강력한 편에 속하였다.
1909년에는 상당수의 의진이 해체되었으므로 형세가 외로와졌기 때문에 전해산의진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체로 남포(藍浦)·부안(扶安) 등 해안가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4월 20일에 부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上西面)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하였다. 점차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의진을 해산하고 가협(加峽) 산중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그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자 "내가 여기에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 하였다.
체포되어 구금된 중에도 적을 꾸짖는 말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옥중에서 수많은 고초를 받았으나 그는 끝내 의연하여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송 받았다. 1909년 12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기각, 그해 2월 22일 상고기각, 3월 18일(음력 2월 8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구의 아전들이 돈을 추렴하여 초상을 치렀다. 그리고 마침 약령시(藥令市)가 열렸으므로 많은 북도의 상인들이 모였는데 이들이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영남의 선비들이 제전(祭奠)을 올렸다. 그의 어머니는 미천한 신분으로 사대부의 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폭도편책 38권 35·36·37면
- ·폭도편책 42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