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남도 보성(宝城) 출신이다.
1908년 고향에서 의거한 안규홍(安圭洪) 의진에 참가하였다.
다시 서세동점(西勢東漸)에 편승한 일본의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탈은 한민족의 일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의병운동이 일어났지만 대체로 유생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중들도 의병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서민출신 의병장의 출현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담살이 출신 안규홍 의진이 보성지방을 거점으로 하여 형성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보성의진은 일제가 1908년 2월 의병운동을 토벌하고자 은밀히 작전을 전개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그들의 작전지대 안에 복병을 두어 적을 완전 궤멸시키는데 성공한 이른바 파청대첩을 거두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진산대첩(眞山大捷)에서 승리하였으나 운월치(雲月峙)로 진군하다가 누봉산(樓鳳山)에서 접전 중 많은 아군의 피해를 보았는데, 이때 참모(參謀) 나창운(羅昌運)이 전사하였다.
의병장 안규홍은 나창운 대신으로 장경선을 참모에 임명하였다. 그것은 앞서의 파청대첩과 진산대첩에서 장경선의 활동이 두드러졌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8월 24일 진산에서 일군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크게 승리를 거두고 화약과 군량을 보충하여 원봉(圓峰) 주둔 기병대를 야습하였다.
기습을 당한 적의 대장 도변(渡邊)은 말을 타고 도주했으며 적 50여 명을 사살하고 적의 창고를 접수하여 물자와 화약을 노획하였다.
다시 10월에 순천(順天) 병치( 峙, 양가령이)에서 적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아 유격장 안택환(安宅煥)과 서기 임정현(任淨鉉)이 전사하였을 뿐 아니라 거점을 보성( 城)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보성을 탈출한 후 고흥(高興)·장흥(長興)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 7월 의병이 해산될 때까지 계속 종군하였다.
그후 9월에 의진의 지도부 인사들이 체포되어 의병운동은 점차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담산실기 1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06, 607, 608, 609면
- 의병들의 항쟁(민족문화협회) 343, 34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