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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873
성명
한자 姜圭彦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3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5 전북(全北)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재학중(在學中) 동교(同校) 교사(敎師) 이두열(李斗悅) 박연세(朴淵世) 등이 주동(主動)한 1919. 3. 6 군산(群山) 장날 독립만세(獨立萬歲) 거사 계획(擧事計劃)참가(參加)하여 1919. 3. 1 ~ 3. 4 학교내(學校內)에서 (約) 7,000여 (枚)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복사하는 등 거사(擧事)를 준비하였으나 주동교사(主動敎師) 등이 사전 검속(檢束)되자 양기철(梁基哲) 전세종(田世鍾)다수(多數) 학생(學生)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군산시내(群山市內)행진(行進)하여 합세(合勢)시민(市民)등 500여(名)군중(群衆)과 함께 군산경찰서(群山警察署)시내(市內) 각처(各處)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살포(撒布)하며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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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5일 당시 그는 전북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에 있는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학생으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李斗悅)·박연세(朴淵世)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3월 1일부터 학교 내에서 약 7,000매의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는 등 거사 준비를 하였으나 주동 인물들이 사전에 검거되자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群山) 장날을 이용하여 합세한 주민 500여 명과 함께 군산경찰서 등 시내 각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아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서 모슬포(摹瑟浦)에 광선학교(光鮮學校)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면서 인재 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4. 30 대구복심법원)
  • 판결문(1919. 6. 12 고등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24·5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283면
  • 제주백년(강용삼편저, 1984. 11. 15) 259∼26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498∼1503면
  • 집행원부(執行原簿)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규언 - 전라남도 제주(濟州) 3.1운동
본문
1898년 4월 17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대정면(大靜面,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下摹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거주지는 제주도 좌면(左面) 중문리(中文里, 현 서귀포시 중문동)였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1914년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巖里, 현 군산시 구암동)에 있는 중학 수준의 기독교회 부속학교인 영명학교(永明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북 김제군 출신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金炳洙)를 통해 군산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고 만세 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가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이두열(李斗悅)·김성은(金聖恩)·유희순(兪熙淳)·양기준(梁基俊)·유한종(劉漢鍾)·양성도(楊成道) 등과 군산 장날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고, 영명학교 학생들에게 3월 1일부터 3월 4일까지 교내에서 독립선언서 약 7,000장을 등사하도록 하였다. 3월 5일 오전 수업이 끝날 무렵, 이를 탐지한 군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교사 이두열·김수영(金洙榮)·박연세 등을 연행해 갔다. 그러자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동교생인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이도준(李道俊)·홍천경(洪天敬)·고준명(高俊明)·유복섭(劉複燮)·오한길(吳漢吉)·강인성(姜仁聲) 등 다수 학생과 함께 준비된 태극기를 흔들고 시내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주변에 있던 주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시내 각 지역을 행진하며 독립선언서를 살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군산경찰서로 가서 구속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 시위를 펼치다 체포되었다.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숭실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중퇴하고 모교인 영명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고향인 제주로 가서 모슬포에 광선학교(光鮮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22년 6월에는 기독청년회 창립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7년에는 『동아일보』 제주지국 기자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6월(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4-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6-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군옥 삼일운동 기념비/만세상 전라북도 군산시
2 기념관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전라북도 군산시
3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4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 비석 군산 3·1독립운동 기념비 전라북도 군산시
6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7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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