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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861
성명
한자 金永厚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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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3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5 전북(全北)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재학중(在學中) 동교(同校) 교사(敎師) 이두열(李斗悅) 박연세(朴淵世) 등이 주동(主動)한 1919. 3. 6 군산(群山) 장날 독립만세(獨立萬歲) 거사 계획(擧事計劃)참가(參加)하여 1919. 3. 1 ~ 3. 4 학교내(學校內)에서 (約) 7,000여 (枚)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복사하는 등 거사(擧事)를 준비하였으나 주동교사(主動敎師) 등이 사전 검속(檢束)되자 양기철(梁基哲) 전세종(田世鍾)다수(多數) 학생(學生)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군산시내(群山市內)행진(行進)하여 합세(合勢)시민(市民)등 500여명의 군중(群衆)과 함께 군산경찰서(群山警察署)시내(市內) 각처(各處)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살포(撒布)하며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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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전북 옥구(沃溝) 사람이다.

1919년 3월 5일 당시 옥구군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에 있는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학생으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李斗悅)·박연세(朴淵世)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학교 내에서 약 7천 매의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는 등 준비를 하였으나 주동인물들이 사전에 검거되고 말았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 등 여러 학생들과 장날인 3월 6일 태극기를 흔들며 군산시내로 시위행진을 펼쳤으며 합세한 주민 500여 명과 함께 군산경찰서 등 시내 각처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아, 다시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12 고등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524·52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498∼1503면
  • 판결문(1919. 4. 30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28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영후 - 전라북도 옥구(沃溝) 군산 만세시위
본문
1897년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開井面) 아동리(阿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 학생으로 3월 5일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1919년 2월 25일, 전북 출신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생도인 김병수(金炳洙)는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자 군산으로 내려왔다. 김병수의 권유를 받고 영명중학교 교사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박연세(朴淵世), 그리고 같은 교회 부속 여학교 교사 고석주(高錫柱) 등이 만세운동 계획에 가세하였다. 교사들은 이외에도 3월 1일 학교·교회·병원에서 자신들과 뜻을 같이 할 사람을 찾아 참여를 권유하였다. 영명중학교에 재학하던 중 이 계획을 듣고 동의하여 참여를 결정하였다.3월 1일부터 4일까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영명학교 등사판을 이용해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약 7천매를 복사하였다. 그러나 군산 장날을 맞춰 잡은 시위 하루 전인 3월 5일, 이들의 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중심 인물이던 영명학교 교사들이 군산경찰서로 잡혀가자, 시위 계획에 참여한 나머지 인물들은 즉시 거사를 일으키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하였다. 이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주도자들은 시위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다른 영명중학교 학생들과 여학교 학생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행렬에 참여하였다. 기독교 신도들과 일반 주민들도 합세하여 시내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의 수는 5백여 명에 이르렀다. 일부는 군산경찰서로 돌진하여 구금된 교사들의 석방을 외쳤다.이처럼 만세시위를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 판결에 대해 “평화를 근본적으로 하려면 인민의 정도에 따라 자유 독립하게 하는 것으로, 반만년의 역사국인 한반도는 독립하여 자유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상고했지만, 같은 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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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6월(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대구복심법원형사제1부 1919-04-30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6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형사제1부 1919-04-30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6-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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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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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군옥 삼일운동 기념비/만세상 전라북도 군산시
2 기념관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 전라북도 군산시
3 비석 군산 3·1독립운동 기념비 전라북도 군산시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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