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북도 옥구 출신으로 군산의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 있었다.1919년 3월 5일 김병수(金炳洙)·박연세(朴淵世)·이두열(李斗悅) 등과 함께, 군산(群山)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서울의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200여매의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군산에서 활약하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 학생인 김병수가 서울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전해 주면서부터 계획되었다.당시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인 그는, 2월 26일 김병수가 군산에 도착하자, 박연세의 집에서 동료교사 이두열·김수영(金洙榮)·고석주(高錫柱)·김인묵(金寅默)·이동욱(李東旭)·김병수 등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군산장날인 3월 6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한 후,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그러나 거사 전날인 3월 5일 오전 수업을 마칠 무렵, 시위계획을 눈치챈 군산 경찰서의 일본 순경이 와서 박연세·이두열·김수영 등을 강제로 연행해 갔다. 이 사실을 안 그는 다른 동료교사·학생들과 긴급회의를 열어, 즉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군산시내로 뛰쳐나갔다. 이때 보통학교 학생·기독교도·일반주민들도 만세시위 대열에 참가하여, 시위군중은 갑자기 5백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재향군인과 이리(裡里) 주재 헌병대의 응원을 얻은 일본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2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83면
- 판결문(1920. 11. 4 대구복심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