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함경남도 함흥(咸興) 사람이다.
1919년 3월 3일의 함흥읍 장날을 이용하여, 한영호(韓泳鎬)·이순기(李舜基)·이영화(李榮華)·조영신(趙永信)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2월 26일 평양 숭실중학교(平壤崇實中學校) 교사 강봉우(姜鳳羽)가 함경도와 간도(間島)지방을 순회하고, 신창리(新昌里) 교회에 들려, 제1차 세계대전이후의 국제 정세와 한국의 정세를 알리면서부터 계획되었다.
또한 원산(元山) 광석동(廣石洞) 교회의 장로 이순영(李順榮)이 중하리(中荷里) 교회에 와서, 원산에서는 3월 1일 거사한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이에 영신학교(永信學校) 교사인 그는 교회 간부들과 숙의를 거듭한 끝에 한영호·이순기·이영화 등과 집행위원이 되어, 만세시위 일자를 장날인 3월 3일로 결정하였으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등사하기로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투옥자의 생활비·변호인 선정 등의 문제를 담당하였다.
한편, 함흥고등보통학교(咸興高等普通學校)·함흥농업학교(咸興農業學校)·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의 3·4학년생으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에서도, 서울의 학생대표인 강기덕(康基德)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시위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3월 1일 간부회의를 열어 12인의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튿날에는 권영주(權永周)의 집에 모여 3일 새벽 4시 30분 서함흥(西咸興) 역전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같은 만세운동계획이 구체화됨에 따라 주동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에 필요한 경비를 5원 내지 1백원씩 갹출하고, 3월 1일 읍내에 가서 도상록(都相祿)·곽선죽(郭善竹)·김치선(金致善)·박희성(朴希聖) 등을 만나 독립만세시위계획을 이야기하고, 인근 주민들에게도 연락하도록 권유하였다.
이튿날에는 동지들과 자기 집에서 만나 조영신이 원산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 3천여매를 등사하고, 태극기 18매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과는 달리 3월 2일 주민들의 자발적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놀란 일본 경찰이 3월 3일 새벽에 예비 검속을 실시하여 많은 주동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체포되어, 이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692·9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009·1011∼10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247·24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권 97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