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이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 정책이 적극 추진되어 을사조약에 이어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구한국군 마저 강제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국내의 우국지사들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판단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고향 보성(寶城)에서도 담살이 안규홍(安圭洪)을 중심으로 의병이 조직되었다.
송경회는 안규홍 의진에 입대하여 그 좌우익 부장(左右翼 副長)에 임명되어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호남 일대에서 안규홍 의진의 형세가 날로 성세를 이루어가자 일제는 위기의식을 느껴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이른바 파청(巴靑) 전투가 바로 이들 토벌대와 안규홍 의진과의 접전이었다.
이어서 4월에 득량면(得粮面)의 비들기치(峙) 전투에서 일본 8중대장 수호구웅(水戶久雄) 부대의 수백 명의 적과 접전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고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여 군수에 보태었다. 5월에 문덕(文德)의 양가랭이치( 峙) 및 화순(和順)의 동북쪽에 위치한 운월치(雲月峙) 전투에서 적의 기마부대를 진산(眞山)으로 유인하여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7월에는 해남(海南)으로 의진의 거점을 옮겨 적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교전 중에 불운하게 적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받고 광주형무소(光州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08·60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21·329·3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