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도규의 본은 김해이며, 보성(寶城) 출신이다.
이조(吏曹) 참의(參議) 일송(一松) 선생 현(俔)의 10대손이며 형국(炯國)의 아들이다.
목감동리(木甘洞里) 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몸이 강건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하여서 일찍이 동료들과 함께 무사(武事)를 배우고 진(陣)치는 법을 연습했다. 특히 산이 돌고 물이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려고 했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통분한 생각을 갖고 근심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고향 보성에서 담산 안규홍(澹山 安圭洪)이 거의했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집고 쫓아가서 모든 시설과 방략에 대하여 조언하였다. 호곡(毫谷)싸움에서 먼저 왜적의 괴수를 목베고 안규홍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며 노획할 때에 분대별로 정비하기를 법도가 있게 하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기이한 진을 벌였기 때문에 적을 목베이고 포로로 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운월(雲月)싸움에서는 먼저 대포를 쏘아 왜적의 장수를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병치(並峙)와 진산(眞山)싸움에서도 한 번도 의기를 꺾이지 않고 성공한 일이 많았으나 자기가 잘해서 공을 세웠다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공로를 윗사람에게 돌렸다.
또 김도규는 부하들과 함께 달고 쓴 것을 같이 겪어 술 한 잔이나 고기 한 조각이라도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안규홍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자, 김도규는 이름을 숨기고 은신하였다. 항상 안규홍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기고 그와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죽은 듯이 살았다.
비록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글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역량이 크고, 정직하고, 경우가 분명하며 충성과 의리를 중히 여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6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