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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395
성명
한자 金道珪
이명 金宗文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1908년 안규홍 의장(安圭洪義將)의 휘하의 부장(副長)으로서 동년 10월 보성(寶城)호곡(毫谷), 득량(得粮)작전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동복내 운월치(同福內雲月峙)순천 병치 작전(順天竝峙作戰)에서 전공을 수립한 후 1909년 8월 보성(寶城)단봉(丹峯)에서 일군진을 기습공격하여 무기 다수를 노획(鹵獲)하는 전과를 거양하였으나 그후 일군대부대의 공격으로 실패한 후 피신생활을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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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김도규의 본은 김해이며, 보성(寶城) 출신이다.

이조(吏曹) 참의(參議) 일송(一松) 선생 현(俔)의 10대손이며 형국(炯國)의 아들이다.

목감동리(木甘洞里) 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몸이 강건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하여서 일찍이 동료들과 함께 무사(武事)를 배우고 진(陣)치는 법을 연습했다. 특히 산이 돌고 물이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려고 했고,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으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통분한 생각을 갖고 근심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고향 보성에서 담산 안규홍(澹山 安圭洪)이 거의했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집고 쫓아가서 모든 시설과 방략에 대하여 조언하였다. 호곡(毫谷)싸움에서 먼저 왜적의 괴수를 목베고 안규홍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며 노획할 때에 분대별로 정비하기를 법도가 있게 하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기이한 진을 벌였기 때문에 적을 목베이고 포로로 잡은 수가 매우 많았다.

운월(雲月)싸움에서는 먼저 대포를 쏘아 왜적의 장수를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병치(並峙)와 진산(眞山)싸움에서도 한 번도 의기를 꺾이지 않고 성공한 일이 많았으나 자기가 잘해서 공을 세웠다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공로를 윗사람에게 돌렸다.

또 김도규는 부하들과 함께 달고 쓴 것을 같이 겪어 술 한 잔이나 고기 한 조각이라도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안규홍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자, 김도규는 이름을 숨기고 은신하였다. 항상 안규홍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기고 그와 함께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죽은 듯이 살았다.

비록 가정환경이 불우하여 글을 배우지는 못하였지만 역량이 크고, 정직하고, 경우가 분명하며 충성과 의리를 중히 여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6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도규 - 전남 보성(寶城) 후기의병
본문
1885년 6월 17일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조성면(鳥城面) 목감동리(木甘洞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일송(一松) 김현(金俔)의 10대손으로 부친은 김형국(金炯國)이다. 자는 인언(仁彦)이다. 이명은 김종문(金宗文)이다. 집안이 몰락하여 가난했기 때문에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외모가 매우 강건하고 의지와 기개가 호탕하여 주변에 교우가 많았다. 또한 젊어서 친우들과 함께 무예를 연마하고 진법(陣法)을 연습하는 등 무사(武事)에 관심이 많았다. 평소 산이 돌고 내가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았으며,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에 분한 생각을 가지며 근심하였다 한다. 그러던 중 1907년 한일신협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해산이 강행되는 등 국권이 상실되는 위기를 맞이하자 거의를 다짐하였다. 마침 보성 출신의 안규홍(安圭洪)이 거의하자 칼을 들고 달려가서 호응하였다. 안규홍은 ‘안담살이’라는 별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머슴 출신이었으며,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머슴이거나 가난한 농민이었기 때문에 ‘안담살이 의병’이라 칭하였다. 박곡(亳谷)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안담살이 의병’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전투 방략에 대한 조언을 하거나 전투에 참여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안담살이 의병’은 원수를 갚고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애국구민(愛國救民)’을 활동 목표로 내세웠다. 즉, 이들은 활동 방침으로 첫째 탐학한 관리와 주구자(誅求者)의 근절, 둘째 친일 세력 처단, 셋째 일본인 구축을 내세웠다. 따라서 이들은 일본 세력의 퇴치뿐 아니라 백성을 괴롭히는 간사하고 좀스러운 관리들도 처단하였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병의 민간인 침탈 행위도 엄격히 금지하였다. 그들은 주로 부재지주의 소작료를 빼앗아 군용금으로 충당하였으며, 이를 가난한 소작인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보성·장흥·순천 등지에서는 일진회원 등 친일 세력을 처단하였다. 또한 광양의 백운산을 근거지로 하여 보성·순천 등 전남 동부 지역과 순창·남원 등 전북 동남부 지역에서 일본군을 습격하거나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또한 심남일 의병부대와 연대하는 한편, 주로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 전술을 전개해나갔다. 1908년 5월 운월치(雲月峙) 전투에서 일본군 장교를 사살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진산(眞山)에서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인해 안규홍 의병장은 의병의 해산을 명령하였으며, 자신은 붙잡혀 1911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의진 해산 이후 이름을 숨기고 은신하였으나 안규홍 의병장의 죽음을 애석해 하며 그와 죽음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평생 한탄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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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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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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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설봉 김도규의병장 기적비 전라남도 보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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