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박천(博川) 사람으로 1928년 경북 영주군(榮州郡) 풍기면(豊基面)으로 옮겨 살았다.
1937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1940년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시보(上海時報) 기자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 남경(南京)에 있는 중앙대학(中央大學)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이일범(李一凡) 조일문(趙一文) 박철원(朴哲遠) 이정선(李正善) 신영묵(申榮默) 박익득(朴益得) 등과 중국 정부 특파원인 능지남(凌志男) 상교(上校)와 접선되어 한족동맹(韓族同盟)이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또한 중국인 동창인 왕해청(王海靑) 소건국(蘇建國) 능담여(凌澹如) 임세원(林世源) 등의 협조로 애국청년규합, 왜군동태탐사, 초모인원 후송공작 등의 임무를 전개하였다. 특히 초모된 애국청년들의 후송 임무는 왕해청 소건국 등이 책임을 지고 중경(重慶)과 서안(西安) 및 제3전구 지역을 내왕하였다.
1943년에는 중경(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원인 김병호(金炳豪)와 연결되었으며, 이들은 남경(南京)지구 지하공작 상황을 이범석(李範奭) 지대장에게 보고하는 등, 많은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44년에 접어들면서 그 동안 남경(南京)에서 지하공작을 펴 오던 임시정부 특파원 김병호(金炳豪)가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됨으로써 남경(南京) 중앙대학 학생들은 물론 화중(華中)일대에 걸쳐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덕원(金德元) 이일범(李一凡) 조일문(趙一文) 이정선(李正善) 등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1944년 6월경 상해(上海)에 있는 일본영사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받은 후 일본 장기(長崎)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상권 30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42 4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4 8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