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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321
성명
한자 金泰元
이명 金準, 金太仲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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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3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07년 호남(湖南)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 백여명을 살해 하였음.

2. 1908년 왜병과 싸우다가 부상하여 나주(羅州) 박산촌(博山村)에서 치료중 왜병에게 피살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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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김태원은 1870년 9월 16일 전남 나주군 문평면 갈마리(文平面 渴馬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지략(智略)이 웅대하였으며 벼슬은 순릉참봉(順陵參奉)에 그쳤으나 국운이 기울어지매 국사에 부심하였다. 갑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東學)에 척양척왜(斥洋斥倭) 사상이 있다하므로 일시 참여하였으나 민폐가 자심하여 아우 율(聿)과 함께 수원에 피해 살았다. 1907년 9월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장성(長城)에서 거의하였다는 말을 듣고 일가인 전 참봉 김 돈(金 燉)과 의논하여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선봉장이 되었다. 9월 9일에는 고창(高敞)의 일군을 무찔렀으며, 의진의 전세를 확장할 목적으로 김 준은 성재와 영역을 달리하여 활약할 것을 결의하였다. 1907년 10월 4일에는 몽암 신덕순(夢庵 申德淳)과 정읍 내장사(內藏寺)에서 만나서 창의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서로 합세하기로 하고 덕순은 도독이 되고, 태원은 선봉이 되고, 아우 박사(博士) 율은 호군(護軍)이 되었다. 이 때 의사가 이미 수백 명이 되었으므로 광주 영(營)을 무찌르고 목포(木浦)를 깨뜨릴 계획으로 광주로 격문을 띄웠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으로 들어가 무기를 감추어 두었던 곳을 찾아갔으나 이미 적에게 빼앗긴 뒤 이였다. 다시 회문산으로 회군하였는데 적군의 내침을 당하였다. 밤길 1백여 리나 걸어온 군사들이 모두 휴식하고 있을 때이었다. 이 전투에서 신덕순은 체포되어 정읍으로 압송되고, 의진은 일시 무너졌다. 12월 김 준은 나주,함평,28장성,무안 등지를 신출귀몰하듯 휩쓸어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순사를 사살하고, 수차례 토벌대와 접전하고 이어서 그 지휘가 천단조장(川端曹長)과 부하를 사살하는 등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지만, 김 준 의진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즈음 체포당한 부하들의 재판기록을 보면 그의 활약상과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나주에서 미곡상을 하던 당시 34세의 조정인(趙正仁)은 수백 명과 함께 4백여 정의 총기를 휴대하고 나주,함평,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한 혐의로 1908년 6월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8세의 심수근(沈守根)은 조정인의 명을 받아 나주 가산(佳山)에서 탄환제조하는 것을 경비하다가 4월에 체포되어 조정인과 함께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윤원거(尹元擧)는 무안군 금동면 옥동(金洞面 玉洞)에서 살던 사람으로 12월 14~15일경(양) 김 준과 그의 부하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 때 이응문(李應文)으로부터 돈 23관을 기탁 받았다. 물론 이 돈은 김 준의 거사 자금의 일부이었다. 그 이후 성재와 합진하여 영광에 있는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하여 먼저 법성포(法聖浦)에 불을 질러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이것은 11월 25일 참모장 김익중(金翼中)과 이남규(李南圭)가 전사한 것에 대한 보복전이었다. 다시 김 준은 광주,나주로 옮기고 성재는 장성으로 돌아갔다. 이때 율의 진은 사호(沙湖)에 있었는데 율이 본래 성재의 문인으로서 박사(博士)라 칭해졌으므로 그의 진을 박사진이라 일컬었다. 때마침 율의 진이 적의 공격을 받아 흩어졌으므로 선봉장 조경환(曺京煥),도포장 최동학(崔東鶴)과 상의하여 의진을 동복,창평 등지로 옮겼다. 김 율 역시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따랐다. 창평의 지곡(芝谷)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고 무동촌(舞童村)으로 진군한 것이 1908년 1월 1일(음)이었다. 이 날은 순창(淳昌) 구수동(九水洞)에서 은신하고 있던 성재 기삼연이 체포된 날이다. 한편 김 준은 적장 길전 승삼랑(吉田勝三郞)이 이끄는 기마병에 쫓기게 되었다. 길전은 10척 장신으로 용력이 뛰어났으나 접전 끝에 김 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러나 김 준의 부하 강길환(姜吉煥),조덕관(趙德寬)이 전사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으나, 김 율의 군사가 협공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전투에 이운선(李雲善)이 참여하였는데 김 준이 전사할 때까지 함께 활약하다가 다시 조경환의 부하가 되었으며, 1909년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민영(李敏英) 역시 김 준의 부하로서 5년형을 받았다. 그 후 김 준의 의진은 장성 월평(月坪)에 머물렀다. 이 때 성재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상복을 입고 토천(土泉) 뒷산에 돌로 성을 쌓아 적병을 유인하여 적장 철도 삼전(鐵道三田)을 사살하였다. 그날 밤으로 영광 땅으로 향하였는데 낭월산(郎月山)에서 적을 만나 도포장 최동학이 죽고 이어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재 사후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 전세를 화려하게 펼쳤다. 세력 확대를 위하여 이대극(李大克)과 결탁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스스로 대장으로 칭하였고 군도를 차고 쌍안경을 가지고 다녔는데 동작이 기민하여 신출귀몰하였으므로 당시 일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전공은 동료 의병들 간에도 크게 평가되고 있었다. 3월 21일(양) 장성군 광곡(廣谷)에서 부하 약 80명을 이끌고 잠복 활동하다가 토벌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암굴에 은거하였다가 밤을 타서 탈출하였으며, 그 후 10여하 적의 공격을 받았다. 다시 나주 박산촌(博山村)에서 지병을 치료하다가 적에게 발각되었으나 그의 지병이 악화되어 대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4월 25일(양) 부하 20여 명과 함께 적에 의해 어등산(魚等山)에서 사살 순사하고 말았다. 일찍이 그와 함께 의거를 일으킨 동지이며 아우인 율 역시 3월 30일 체포되어 김 준 사후에 처형당하였다. 그의 처는 아들 하나를 기르다가 고종의 상을 당하자 아들을 문중에 맡기고 그날 밤 자결하였다. 그는 일찍이 의병을 일으켜 적병 수백을 살상하였으나, 병(兵)은 정예(精銳)가 중요한 것이지 숫자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하여 늘상 거느린 부하는 삼,사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의병에 있어서 정예주의를 지켜 부하 훈련에 치밀하였기 때문에 그의 부하이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후 각기 의병장이 되어 각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로써 유명한 의병장이 된 인물은 조경환과 오성술(吳聖述), 전해산(全海山)을 들 수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45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6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4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57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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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태원 호 : 죽봉(竹峰), 이명 : 김준(金準), 김태중(金太仲) 전라남도 나주(羅州) -
본문
1870년 9월 16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문평면(文平面) 북동리(北洞里) 갈마지(渴馬池)에서 태어났다.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냈다. 본명은 김준(金準)이다. 호(號)는 죽봉(竹峰), 본관은 경주이다. 김태중(金太仲)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김노학(金魯學)이며 어머니는 장수 황씨(長水黃氏)이다. 아버지는 유림들과 교유하며 아들의 교육에도 힘썼다.24세가 되던 해인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동학의 척양척왜(斥洋斥倭) 사상에 동감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참여하였다. 동학의 척양척왜는 서양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반외세투쟁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학 조직 내부의 문제에 실망스런 부분이 있어 아우 김율(金聿)과 함께 수원으로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는 나주 향리들의 잘못된 관행과 해묵은 비리들을 바로잡는 것에 힘썼다.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상실의 분함을 참을 수 없었기에 김돈(金燉) 등 동지들과 앞날을 상의하였다. 1907년 9월 김돈한테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이 장성군(長城郡)에서 거의하였다는 것과 힘을 합하여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들었다. 군사를 이끌고 합세하기로 결심한 후,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기 위하여 장성으로 갔다. 기삼연에게 군사적 지식과 대담성 등을 높이 인정받아,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先鋒將)에 임명되었다.선봉장의 임무를 맡은 후 고창군(高敞郡)의 일본군을 무찌르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은 일본군의 역습으로 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다른 지역의 의병도 일제의 탄압에 맞서 어려운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들 대부분이 훈련된 정예부대가 아니었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기삼연과 의병부대를 나누어 지리에 익숙한 점을 이용해 기동성을 높여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1907년 10월 4일 몽암(夢庵) 신덕순(申德淳)과 정읍군(井邑郡) 내장사(內藏寺)에서 만나 거의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합세하기로 결의한 후 신덕순을 도독으로 삼고 스스로 선봉이 되었으며, 아우 율은 호군(護軍)을 맡았다. 이후 많은 의병들이 모여들어 부대원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광주(光州)의 영(營)을 무찌르고 목포(木浦)를 깨뜨릴 계획으로 광주로 격문을 보냈다. 이후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군(淳昌郡) 회문산(回文山)으로 이동해 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적의 내침을 당해 신덕순이 체포되고 의병부대는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08년 1월에는 동복군(同福郡) 무동산(舞童山)에서 요시다 카츠사부로(吉田勝三郎)의 기병부대 150명과 접전을 벌여 대장 요시다를 사살하였다. 이때 담양(潭陽)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기삼연이 체포되자 병사 30명을 이끌고 경양역(景陽驛)까지 일본군을 추격하였으나, 기삼연의 구출에는 실패하였다. 일제는 기삼연을 구출하려는 활동이 있음을 눈치채고 체포된 기삼연을 불법적으로 광주에서 총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삼연이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호남의소(湖南義所)라고 부대 이름을 바꾸어 친일인사·밀정·자위단원(自衛團員)·일진회원(一進會員) 등을 처단하였으며, 납세거부투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그러나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 기슭의 박산(朴山)에서 일제 기병대, 순사대와 맞서 싸우다 적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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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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