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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3
성명
한자 金昌沃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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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3.1운동에 참여하여 주동적으로 활동 공적을 세우고 3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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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禮安面)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예안면장인 신상면(申相冕)이 3월 11일 밤 9시에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이광호(李洸鎬) 등을 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 독립신문을 보여주면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함으로써 발단이 되었는데,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하여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이곳에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인쇄 제작한다는 계획을 인근의 각 동리로 연락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장터에는 다른 장날과 달리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장꾼으로 위장하고 모여들자, 약속한대로 30여명의 주동자들이 면사무소 뒷편의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세워놓은 대전기념비(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린 후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장터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그는 장터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고 있었는데,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 조전등길(曹田藤吉)이 나와서 25명의 시위자를 잡아가는 것을 보고 오후 7시경, 격분한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를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려 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곧 안동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나타나서 공포를 쏘아대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이어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그도 결국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95∼39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창옥 김창옥(金昌玉) 경상북도 안동(安東) 안동군 만세시위
본문
1878년 3월 16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녹전면(祿轉面) 서삼동(西三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은 김창옥(金昌玉)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예안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안동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3일 안동면(安東面)에서 일어난 이상동(李相東)의 1인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3월 27일 풍남면(豊南面) 하회동(河回洞) 만세시위까지 안동에서는 모두 14회에 걸쳐 10,00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3월 17일부터 23일까지가 절정기였다. 이 기간 동안 안동면·예안면(禮安面)·임동면(臨東面)에서는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예안면의 만세시위는 면장과 면서기들이 주도하였다. 3월 11일 예안면장인 신상면(申相冕)의 주도하에 백남학(白南鶴)·신동희(申東熙)·신응두(申應斗)·이광호(李洸鎬)·이남호(李南鎬)·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호명(李鎬明) 등이 예안면사무소 숙직실에 모여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신상면은 3월 12일이 장날이기는 하나 바로 거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다음 장날인 3월 17일에 거사할 것을 제안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동시에 예안면의 유림 지도자 조수인(趙修仁)도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조수인은 김진휘(金鎭暉)·이원영(李源永)·조맹호(趙孟鎬)·조방인(趙邦仁) 등과 의논하여 3월 17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더불어 예안교회(禮安敎會)에서도 3월 17일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고종 인산에 다녀오면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온 신응한(申應漢)과 장로 민태규(閔泰圭) 및 기독교면려청년회(基督敎勉勵靑年會) 간부 신세균(申世均) 등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3월 17일 예안면의 시위는 오후 3시 30분 수십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일본인들이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넘어뜨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작되었다. 이 만세 소리와 함께 시장 주변의 세 곳에 흩어져 있던 시위대가 일제히 시장을 향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예안주재소로 몰려가자 경찰과 군인이 나와서 시위에 앞장서던 15명을 끌고갔다. 오후 6시 시위대는 주재소 앞에서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1,500여 명을 넘어선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둘러싸고 돌과 기왓장을 던졌다. 이날 시위대열에 동참하여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로 진입하여 순사인 소다(曹田藤吉)에게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유리창 등의 기물을 부수고 만세를 부른 죄로 붙잡혔다.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징역 3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5-19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6-21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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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안동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비석 안동 3·1운동 기념비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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