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경남 울주(蔚州) 사람이다.
1927년 가을 유명술(柳命述)과 함께 방어진(方魚津)에서 생선장수를 가장하고 활동하던 중 신주극(申周極)의 지령을 받아 항일격문을 살포하려다 일경에 붙잡혀 구금당하였다고 한다.
1928년에는 대구(大邱)에서 대협(大協)이라는 단체에 가담·활동하던 중 다시 일경에 붙잡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또한 1930년에는 박재기(朴在基)·변기학(卞奇學)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핀 후 흥사단(興士團) 계열의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그는 1932년 서울로 돌아와 김중만(金重晩) 등 3명의 동지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경남 양산(梁山) 일대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구금당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여운형(呂運亨)과 김창숙(金昌淑)의 지시를 받고 건국동맹(建國同盟)의 지하조직 결성에 힘쓰는 한편 항일학생운동에도 관여하다가 붙잡혀 1945년 2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