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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북 의주 비현(枇峴) 사람으로 3·1독립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12월경 만주에서는 무장항일투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한족회(韓族會),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등 여러 단체들이 회의하고 통합하여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수립하였으며, 1920년까지 일경 주재소 파괴 56건, 교전 78회, 일경 사살 100여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그는 동사령부 휘하의 제6영장(營長)이 되었으며, 1920년 2월에는 사령부 특파원으로서 관서지방 파견의 특명을 받고 신계관(申啓寬)·한철수(韓哲洙) 등과 함께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주구배 토벌과 지하기관 조직 및 군자금 모집 등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의주 교외 전투에서 적 헌병등 2명을 사살하고, 적 수백명의 포위 추격을 받았지만 적의 집중공격을 피해가면서 일면 응전, 일면 후퇴로 압록강을 건너 본영에 무사히 귀환하였다. 또한 1920년 7월에는 의주 용천(龍川)·철산(鐵山) 등 지방에 수차 출동하여 정치민(鄭致敏)·정기두(鄭基斗) 및 형 익곤(益坤) 등과 같이 군자금 모집과 일본기관 파괴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월에는 정대흥·김지현 등과 같이 철산 백량면(栢梁面)주재소 악질순사를 사살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밀정 나자현(羅子賢)을 총살하는 등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동년 6월에는 한철수와 같이 환인(桓仁)지방에 출동하여 지방대원 3인과 같이 친일주구배 토벌·군자금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중국 강도들에게 행패를 당하고 있는 교포들을 구해주었으나, 장작림의 중국군부대를 만나 교전하다가 1명을 사살하고 포위 체포되었다가 일경에게 인도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결국 신의주를 거쳐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22년 4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동년 7월 6일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54·259·260·292·436·552·55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5면
- 항일순국의열사전 134·28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8·276·6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39면
- 동아일보(1921. 10. 27, 11. 24, 1922. 4. 13, 4. 17, 7. 13, 1923. 1. 21)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12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