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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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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10984
성명
한자 洪範圖
이명 洪範道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가족관계창설일 2022-07-25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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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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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2021 / 1962 훈격 대한민국장 /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8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장 공적>
일제하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으로 국민통합 및 민족정기 선양, 고려인의 민족정체성을 형성하고 한국과 카자흐스탄 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공적으로 2021. 8. 17.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 하였음.

<대통령장 공적>
1. 만주(滿洲)에서 독립군(獨立軍) 영수(領首)(국민회 소속(國民會所屬) 대한독립군 사령(大韓獨立軍司令)) 김좌진 장군(金佐鎭將軍)과 호응하여 혁혁(赫赫)한 공적을 세웠는데
2. 1907년 갑산(甲山)에서 차도선(車道先), 송상봉(宋相鳳), 허위 등(許瑋等)과 함께 거의(擧義) 북청(北靑)에서 일본군(日本軍) 1(個) 중대(中隊)섬멸(殲滅)하였고
3. 1920년 만주(滿洲) 간도(間島)에서 일병(日兵)을 섬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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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삼수(三水)·갑산(甲山)·북청(北靑) 일대에서 포수생활을 하다가 1895년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후창(厚昌)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말에는 다시 함경남도 갑산(甲山)등지에서 차도선(車道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그 부장(部長)이 되어 갑산(甲山)·산수(山水)·북청(北靑) 등지에서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회원을 주살하고, 우편물을 탈취하며, 전선을 절단하는 등 활동을 하였으며 여러차례 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5월 차도선이 일군의 포로가 된 뒤에는 5백여명의 부하를 지휘하여 귀순을 권유하는 일경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계속 활동하다가 북청수비대(北靑守備隊)의 병력이 점차 증강됨에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였다. 망명후에는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윤세복(尹世復)을 비롯하여 일군으로부터 탈출해 온 차도선(車道善) 등과 함께 장백(長白)·무송(撫松) 등지에서 포수단(砲手團)을 조직, 일제와의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11년 3월에는 부장 박영신(朴永信)을 국내에 진입시켜 무산(武山)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에는 북간도에서 의병(義兵)출신과 간도 및 노령의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군을 창설하였다. 동년 8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惠山鎭)에 진공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이범윤(李範允)과 함께 1,200여명의 독립군을 안도현 이도구(安圖縣二道溝) 방면에 집결시켰다가, 이어서 10월에 국내로 진공하여 평북 강계(江界)와 만포진(滿浦鎭)을 습격 점령하였다. 이어서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하여 일군 7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무사히 본부로 귀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임시정부에서는 당시 평북의 강변8군교통사무국의 참사(參事) 오동진(吳東振)과 김응식(金應植)에게 출장을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일군은 국경지방의 병력을 더욱 증강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그후 그는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두만강 연안의 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 지방으로 계속적인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국내진입작전은 1920년 3월까지 여러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적측을 당황하게 하고 국내 민심을 크게 고무시켰다.

1920년 3월에 그는 병력을 안도현에서 왕청현(汪淸縣)으로 이동시켰으며 7문의 기관총, 2백여정의 권총, 7백여정의 소총을 노령으로부터 들여왔다. 그리고 동년 6월까지 수시로 온성·회령·경원 등을 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되자, 일군은 남양(南陽)수비대 및 19사단을 만주에 파견하여 중국 영토안에서 독립군을 탄압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그는 최진동(崔振東)과 함께 독립군부대를 지휘하여 두만강 대안의 봉오동(鳳梧洞)에서 적의 대부대를 크게 무찔렀으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해 국민회가 독립군 부대들을 재연합하여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를 창설하였을 때에는 그 사령관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10월에는 청산리(靑山里)독립전쟁에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여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崔振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소위 '독립군 대토벌계획'을 세우고 계속적인 추격을 해옴에 따라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게 되었으며, 그는 김좌진·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총재인 서 일(徐一)을 보필하였다. 그후 노령(露領)지역으로 이동한 독립군단은 자유시(自由市)를 근거지로 삼고 소련군과 긴밀한 접촉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소련 공산당의 배반으로 독립군은 무장이 해제되고 포로가 되는 등 소위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1922년 6월 한국혁명군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고려공산당과 한족공산당이 통합하여 브라고에스첸스크에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이 조직되자, 그는 최진동·허근(許根)·안무(安武) 등과 함게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3년 5월경에는 연해주 이만에서 김좌진·이청천·김규식·안무 등과 함께 조선독립단 군정서의회를 열고 독립군의 모집, 무기·군복·양식 등의 보급 및 국내진입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체제가 확고하여짐에 따라 이용가치가 없어진 독립군 간부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다시 여러 방면으로 분산되고 말았다. 그후 그는 연해주지방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다가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한 채 이역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6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192·206·207·314·319·329·330·33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40·73·75·79·80·85·89·91·92·95·98·100·112·115·133·137·139·141·142·143·144·146·147·161·289·323·330·331·339·375·382·390·392·402·403·436·442·448·450·452·455·472·488·492·493·498·508·515·516·519·521·877·879·88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34·153·156·182·183·184·185·188·189·194·234·236·337·347·348·349·351·352·353·355·357·360·361·362·373·374·383·384·394·405·409·410·413·416·417·418·420·422·650·652·661·662·668·673·676·679·681·683·688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47면
  • 무장독립운동사 71·72·73·92·99·100·101·102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34·83·92·117·150면
  • 매천야록 460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0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35·65·72·8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3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0·194·3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8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67·776·77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642·643·669·744·786·787·788·820·8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5·540·555·556·557·657·658·660·693·699·730·732·73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7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14·724·77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56·57·128·174·261·300·325·365·386·388·55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2·36·52·61·63·65·66·251·305·306·319·320·321·330·392·394·424·427·55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5면
  • 고등경찰요사 83·113·114·12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130·182·213·214·232·2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63·86·126·765·815·852·856·871·890·902·905·910·911·913·918·932·969·971·973·1001·1012
  • 박은식전서 상권 470·471·637·638·64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홍범도 호: 여천(汝千) 평남 양덕 -
본문
1868년 8월 27일 평남 양덕(陽德)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① 평남 양덕 ② 평북 자성(慈城) ③ 평양 외성리(外城里)의 세 가지 설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조소앙 「홍범도전」(『素昻先生文集』 상권)의 ‘양덕’설을 따른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호는 여천(汝千)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3년간 삼촌집에서 살다가 부근 지주집의 머슴살이로 들어갔다. 1883년~1887년 5년간 황해도 수안군 수구면 신현리(新峴里)에서 조지소(造紙所)의 고공(雇工)으로 일하였다. 한지(韓紙)를 만드는 수공업체에서 머슴과 다름없는 노동자로 일했음을 말한다. 체격이 건장하였고,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박하고 겸손하며, 신의가 있고, 의협심과 애국심이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87년 머슴살이 노동자 생활을 그만두고 평양의 친군서영(親軍西營, 후에 平壤鎭衛隊로 개칭)에 자원입대하였다. 처음으로 사격술을 배우고 군인 사병이 되었다. 그러나 병졸생활은 기대한 것처럼 나라를 지키는 생활이 아니었다. 장교들의 졸병에 대한 굴욕적인 학대와 부패에 놀라서 졸병생활이 무의미함을 절감하고 3년간 복무한 후 군대생활을 그만두었다. 1891년경 함남 단천으로 가서 광산노동자가 되었다. 1893년경 삼수(三水)의 직업적 산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산짐승 사냥에 종사하였다. 이어서 북청군(후에 豊山郡 소속) 안산사(安山社, 社는 面)로 이사하였는데, 안산사에는 함경도 감영으로부터 공식 승인받은 직업적 산포수들이 있었다. 당시 북청군 안산사(安山社)와 안평사(安坪社) 2면의 직업적 산포수들은 통칭 ‘안산사 포계(安山社 砲契)’로 알려져 있는 동업조합을 만들어 조직화된 포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홍범도는 이 안산사 포계에 가입하여 오래지 않아 포연대장(捕捐大將)에 뽑혔다. 포연대장은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양을 정하고 이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이 지방 산포수들은 빈곤했을 뿐 아니라 무기도 대부분 낡은 화승총(머스킷 총)이었으며 탄약 장비가 열악했다. 하지만 관청에서는 포수들의 포획물이 일정치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기화로 가혹한 세금(포획물 형태)을 부과하고 있었다. 안산사포계의 포연대장인 홍범도는 관청에서 부과하는 세금의 부담을 덜기 위해 분투하였다. 지방관리들은 그를 위협하고 매수하려고도 했으나, 완강히 투쟁하여 포수들의 세금을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이 투쟁을 통해 그는 동료 포수들의 신망을 얻었다. 1893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14년간, 그는 삼수 ・ 갑산 ・ 풍산 ・ 북청 일대에서 포수생활을 했는데, 이 시기는 홍범도의 일생에서 단 한번 단란한 가정생활을 한 시기이기도 했다. 아들 용범(龍範)과 용환(龍煥)을 두었는데, 후에 그가 의병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용환을 제외한 부인과 용범 등 가족은 일제에 체포되어 홍범도를 ‘귀순’시키기 위한 볼모로 이용되었는데, 홍범도가 ‘귀순’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하자 모두 살해되었다. 그후 용환은 ‘홍태준(洪泰俊)’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군 병사를 모집하여, 아버지의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였다. 그가 포수생활을 시작한 직후에 동학농민운동과 일본군의 불법 한반도침입 및 청일전쟁이 일어났는데, 후일 홍범도는 그후 그가 “반일 반봉건 의식에 눈을 뜬 것은 동학농민운동 때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갑산에서 포수 생활을 하고 있을 때,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한 한국군의 군대 해산이 있었고, 9월 7일에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이 공포되어,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과 사냥총까지 모두 회수되었다. 홍범도는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들에게 “일제가 사냥총까지 거두어 가는 것은 우리 민족을 완전히 무장해제시켜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이니, 이에 응하지 말고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그는 태양욱(太陽郁) 등 동지들과 함께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 및 청년들 2백여 명을 규합하여, 1907년 11월 함남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특징은 주로 산포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 전투력’이 막강한 부대였으며 당시의 의병부대들 중에서 ‘최강’이었다는 점이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907년 11월 22일, 홍범도 의병부대는 산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하겠다고 출동한 일본군 북청 수비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또한 11월 23일에는 갑산과 혜산진(惠山鎭) 사이에서 일본군 북청 수비대가 호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였다. 놀란 일본군 북청수비대는 1개 중대를 토벌대로 파견했는데, 홍범도 부대는 11월 24일 후치령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섬멸하였다. 이 전투 후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던 중, 1907년 12월 15일 갑산과 북청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일본군의 군용 물자 수송대를 습격하여 물자를 노획하고 수송병들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크게 놀란 일본군은 북청수비대와 함흥수비대가 합동으로 ‘토벌대’를 만들어 홍범도 의병부대를 공격했다. 홍범도 부대는 차도선(車道善) 의병부대와 통합하여 병력을 4백여 명으로 증가시킨 다음, 12월 3일 중평장(仲坪場)에서 3시간의 혈전 끝에 일본군을 혜산진으로 패주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당시 전국 의병부대들 중에서 홍범도 부대가 최강임을 재확인하고, 북청 ・ 함흥 ・ 성진의 3개 수비대로 1개 대대를 편성하고 1개 기병 소대까지 첨가한 ‘대토벌대’를 편성하여, 삼수에 진을 치고 있는 홍범도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 대부대에 맞대응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유격전법을 택하였다. 삼수에는 1개 소대만 남겨 두고 일본군 토벌대대를 삼수에 묶어 둔 채, 1908년 1월 10일 의병부대 본대가 갑산읍을 기습하여 9시간의 혈전 끝에 일본군 갑산 수비대를 전멸시키고, 우체국 등 일제 기관을 파괴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붙였다. 갑산읍을 점령한 후에는 가급적 정면전을 피하고, 주로 이원 ・ 단천 ・ 풍산 ・ 갑산 ・ 혜산진 일대의 산악 지방을 돌면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기동성이 매우 뛰어나 일본군은 결코 홍범도 부대를 ‘토벌’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군사 행동만으로는 홍범도 부대를 섬멸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한국 황제와 정부의 이름을 빌리고 한국 관리를 보내어 선무공작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08년 3월 27일 홍범도의 동지 차도선이 직계 부하들을 데리고 ‘귀순’함으로써 홍범도 의병 부대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1910년에 들어서면서 탄약이 고갈되어 더 이상 국내에서 싸우기가 어렵게 되자, 1910년 3월 그는 소수의 부하 의병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間島)로 갔다. 홍범도는 근거지를 마련하고, 1911년 3월에는 부장(副將) 박영신(朴永信)이 이끄는 선발대가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경원 수비대를 섬멸시켰다. 하지만 이 전투 후 탄약 고갈로 의병 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의병부대는 해산되었고, 1913년 홍범도는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1운동이 간도에도 파급되자, 그는 3・1운동이 무장 투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독립군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21일자 일제 정보자료는 ‘홍범도가 독립군을 조직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총기를 구입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1919년 5월 그는 북간도에서, 의병출신들과 간도 및 노령의 한국청년 및 산포수들을 모아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였다. 처음 대원은 약 2백 명이었다. 1919년 8월 대한독립군은 국내 진입작전을 단행하여 혜산진 일본군 수비대를 쳐부쉈다. 3・1운동 후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 중 최초의 것이었다. 이어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의 금정(金井)주재소 등 일제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다.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을 점령한 다음, 자성군(慈城郡)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명을 전멸시켰다. 이 사건은 일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상하이 임시정부에도 커다란 자극을 주어, 임시정부에서는 오동진(吳東鎭) ・ 김응식(金應植) 등의 조사원을 파견하여 이 승리를 확인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최초 국내 진공작전의 승전은 3・1운동의 성과를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간도와 노령 일대에는 독립군단이 속출하였고,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겨울 두만강과 압록강이 얼어붙자 독립군 부대들이 이듬해 봄까지 끊임없이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용감히 잘 싸우는 독립군이었으나, 언제나 무기와 병참 보급에 곤란을 겪었다. 그래서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하여 1919년 12월 간도의 교민 단체인 대한국민회(회장 구춘광)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국민회는 직할군대로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국민회군(國民會軍)을 운용하고 있었다. 국민회의 지원으로 대한독립군은 무기도 더욱 충실해지고 병력도 3백 명으로 증가되었다. 1920년 5월 대한독립군은 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최진동 지휘)와 연합해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편성했다. 언제나 겸손하고 공명보다는 실제를 중시하는 홍범도는 대한북로독군부의 행정과 군무를 총괄하는 독군부장(총사령관)의 지위는 최진동에게 돌리고, 자신은 군사지휘권(북로사령부장)만을 맡았다. 이 연합의 결과로 홍범도는 약 1천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화룡현 봉오동(鳳梧洞)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있을 때, 국내에 진입한 신민단(新民團) 독립군 소부대를 추격해 온 일본군 1개 대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까지 들어왔다. 홍범도는 주민을 철수시키고 독립군을 매복시켰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 분지에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를 포위 공격하여 1백 57명을 사살하고 2백 명을 부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4명, 중상 1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대병력을 투입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군에게 군사적 외교적 압력을 가하였다. 이에 독립군과 중국군이 타협하여 근거지를 산악의 밀림 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은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뒤이어 국민회군 ・ 의군부(義軍府) ・ 한민회군(韓民會軍) ・ 광복단(光復團) ・ 의민단(義民團) ・ 신민단(新民團) 등의 독립군부대들도 근거지를 이동하여 대한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도구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하였다. 중국군이 독립군을 ‘토벌’하지 않고 독립군의 근거지만 이동하자, 1920년 10월 일본군 제19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제20사단 ・ 제11사단 ・ 제13사단 ・ 제14사단에서 차출한 2만 5천명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간도를 침공하였다. 이 중에서 아즈마(東)지대(支隊)는 이도구와 삼도구를 포위하고 공격 작전을 개시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처하여 이도구에 모인 대한독립군 ・ 국민회군 ・ 의군부 ・ 한민회군 ・ 광복단 ・ 의민단 ・ 신민단 등의 독립군 부대들은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연합부대의 실전투 병력은 약 1천 4백 명이었다. 한편 삼도구 청산리에 주둔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 6백여 명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첫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의해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에서 시작되었다. 이 백운평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일본군 3백여 명을 사살하고 대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특히 큰 전공을 세웠다. 같은 날 오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 독립군 연합부대가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 아즈마지대 본대 수백 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혼전이 벌어져 일본군이 자기들끼리 사격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독립전쟁의 두 번째 전투인 ‘완루구 전투’이다. 백운평 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는 이도구 갑산촌으로 이동했다가 천수평(泉水坪)에서 일본군 기병대 전초 중대 1백 20명을 섬멸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천수평 전투’이다. 뒤이어 이도구 어랑촌 고지에서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기병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일본군 보병연대까지 합세하여 북로군정서를 포위하였다. 홍범도 부대는 완루구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 나오다가 어랑촌 서남단 고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혈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가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0월 22일 아침부터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서 김좌진 부대 6백 명과 홍범도 부대 1천 4백 명 등 독립군 2천 여명과 일본군 아즈마지대 5천여 명이 아침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혈전을 벌였다. 어랑촌 전투의 결과는 일본군의 패퇴였다. 이것이 가장 격렬했던 ‘어랑촌 전투’로, 청산리 독립전쟁의 네 번째 전투였다. 그후 독립군이 이도구에서 안도현으로 철수하는 26일 새벽까지 6일간 10여 회의 대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청산리 독립전쟁’ 또는 ‘청산리 전투’이다.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일본군은 1천 2백 명의 전사자를 내고 참패했으며, 독립군은 1백 30명의 전사자에 그치는 대승리를 쟁취하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후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1920년 12월 미산(密山)에 모였고, 1921년 6월 흑룡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갔다가, 자유시 알렉세에스크에서 이른바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 경신참변)을 당하였다. 홍범도와 대한독립군은 사할린의용대의 주둔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별로 입지 않았으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은 사할린의용대와 함께 있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자유시에 모인 한국독립군 부대들을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에 소속시키고, 사령관에 가란달라시윌린을 임명하였다. 이어서 1921년 7월 5일 다시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바이칼 호수 부근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21년 8월 5일 자유시의 모든 한국인 군대는 이르쿠츠크로 수송되었다. 홍범도 역시 이 대오에 섞여 이르쿠츠크로 갔다. 1921년 8월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폐지하고 한국인 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제5군단 관할하의 한족여단으로 개편하였다. 홍범도는 노령(老齡)이라는 이유로 다른 노병들과 함께 모스크바 관광에 보내졌다. 1922년 전반기 홍범도는 약간 명의 옛 부하들과 함께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블라고베시첸스크에서 이동휘, 문창범 등과 고려중앙정청을 조직하고, 9월 1일에는 치타에서 대표자 회의를 여는 등 한인사회의 자치활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10월 모스크바정부의 외교교섭으로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스탈린 정부는 제1회 전연방 소비에트대회를 열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출범시켰으며, 연해주도 통치구역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 1923년 1월부터 소련 영토 내에서 한국인의 무장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1923~24년경부터 홍범도는 이만에서 옛 부하들과 함께 집단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군의 재기 기회를 기다리다가, 1926년경에는 중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937년 스탈린 정부는 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는 비인도적 정책을 자행하였다. ‘집단농장의 69세 지도자’ 홍범도는 20~30만의 한국인(고려인)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현재의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 지방에 정착하여 집단농장을 개척하였다. 크질오르다에서 만년의 홍범도에 대하여 기록한 예술가 진창화의 회고담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73세의 나이로 정규군으로 참전을 자원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싸울 힘과 유연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사병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사격장에서 의심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25m 떨어진 거리에서 5코페이카 짜리 동전을 명중시켰다고 한다. 그는 크질오르다에서 활동하던 소련 한인극단을 찾아가 연극 극단의 물품 돌보는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부탁하였다. 극단의 희곡작가 태장춘은 홍범도의 의병운동과 독립군 무장투쟁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한 희곡 ‘홍범도’를 창작하여 소련 중앙아시아 한인극단에서 공연하였다. 홍범도는 희곡 창작과정에서 태장춘에게 자신의 영웅적 행동보다는 전우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고, 사실을 본래 그대로 묘사해 주기를 주장하여, 연극에 알맞게 사실을 옮기려는 태장춘이 적지않은 어려움에 부딪쳤다고 한다. 부하 전우들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홍범도의 진면모였다.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는 75세의 나이로 크질오르다에서 순국하였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눈앞에 두었을 때, 그는 부관과 함께 만주의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아스라이 보이는 고국의 산맥을 바라보며 “내 몇 년 뒤에나 고국산천을 볼까”하고 눈물을 닦았다. 2년 후 그리던 조국이 해방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소원하던 고국산천의 흙을 다시 밟아보지도 못하고, 강제로 이주된 타향에서 동포들의 애도 속에 서거하였다. 홍범도의 무덤은 현재 크질오르다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무장투쟁과 국권 피탈 후 항일무장독립운동 과정에서 잘 무장된 우세한 군사력의 일본 정규군을 도처에서 민첩하게 공격하여 무찌른, 한국민족독립운동사 상 영원불멸의 전설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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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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