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안남도 용강(龍岡)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홍경래(洪景來)의 후손으로, 어려서 한학과 필법을 배웠고, 1886년(고종 23)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首接主)·대접주(大接主)·창의대령(倡義大領)등을 역임하고 동학혁명에 가담했다. 1910년 이후에는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국외의 독립단체에 제공했으며,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조국광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점차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배관키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천도교측 간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찬성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키로 하였다. 27일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오세창·최 린(崔麟)·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다시 만나,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준비사항을 최종 협의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의 도사(道師)·장로(長老)를 지내면서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17·2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681·68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614·6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1·117·268·355·40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03·147·148·174·48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5면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18·821-82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4·20·21·28·38·41-5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