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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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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玄天默
이명 白醉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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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8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경성인(鏡城人)으로 경술국치 후(庚戌國恥後) 동만(東滿)으로 망명(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 363)
2. 1919년 군정부(軍政府) 중심인물(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318)
3. 1919년 3.1운동후 서일(徐一)과 함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부총재(副總裁)에 취임하여 교포 계몽(橋胞啓蒙)과 사관양성에 전력하다(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487) 동국혈사(東國血史) (二) p. 59)
4. 1920년 청산리 전역(靑山里戰役)에서 대 전과(大戰果)를 걷우다(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487)
5. 1920년 10월 간북 북부(墾北北部) 총판부(總辦部) 부총판(副總辦)(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318) (민족운동연감(民族運動年鑑))
6. 1923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김좌진(金佐鎭)영고탑(寧古塔)에서 독립국의 대회(大會)를 개최하는데 각지에서 오백여명(五百余名)이 모였는데 그 중에도 유명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현천점(玄天點)등이 수령(首領)이 참가(동아일보(東亞日報) 1923. 3. 6)
7. 1925년 10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국무원(國務員)으로 임명(단 취임(但就任)치 않고 자퇴) (민족운동연감(民族運動年鑑) p. 203)
8. 1926년 2월 18일 국무원에 취임치 않음으로 해직(解職)(민족운동연감(民族運動年鑑) p. 206)
9. 1926년 10월 10일 (任) 국무원(민족운동연감(民族運動年鑑) p. 210)
10. 연길한교육회(延吉韓敎育會) 주요 멤버(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 926)
11. 영안현(寧安縣)에서 병사(病死)(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487)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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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함북 경성(鏡城) 사람으로 대종교인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1912년 북간도지역에 동일학교(東一學校)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8월에 서 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길림성 왕청현 서대파구(吉林省汪淸縣西大波溝)에 군정부를 조직하고 부총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청산리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또한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부총판으로서 왕청(汪淸)·혼춘(琿春)·동녕(東寧)·영안(寧安)·목릉(穆稜)일대를 관장하였다.

1923년 김좌진이 영고탑(寧古塔)에서 독립단 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대한독립군정서 대표로 이중장(李仲裝)과 함께 참가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김 혁(金赫)·나중소(羅仲昭) 등이 북만 녕안현(寧安縣)에서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사법(司法)기관인 검사원 원장으로서 강규상(姜奎尙)·여호산(廬湖山)·황국민(黃國敏)·강인수(姜寅秀)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동년 9월 이상룡(李相龍)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그는 이 탁(李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윤세용(尹世茸)·김좌진 등과 함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아, 1926년 2월 18일 해직되었으나, 1926년 10월 10일 다시 국무원에 임명되는 등 만주의 무장단체와 임시정부간 독립운동 지휘체계상 문제점이 노정(露呈)되기도 하였다.

그후 영안현(寧安縣)에서 병으로 별세하니, 대종교의 호석(湖石) 강 우(姜虞)는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지었다.

追悼 玄白醉 天默 文

南道 本司에서(1928)

鳴呼痛矣 白醉先生 山川鍾毓 生長有鄕 咸鏡以北 鏡城之陽 其姿英邁 厥品純良 綢 志氣 磊落心等 義俠高風 介潔淸霜 世値 攘 志切奮揚 建校設塾 驅馳四方 輪 熱血 每泣敎場 崇奉大敎 無怠無荒 一誠十載 靑湖敎堂 神誥大讀 倧理廣場 尙敎天職 副典人亨 北關豪傑 東道文章 白首飄零 靑年贊襄 久愈篤信 老益健康 意亨百歲 一何身恙 風塵飄泊 家國莽蒼 慨世長病 意化仙庄 密江江上 恨水 悲波鳴咽 愁雲悽湛 一聲長慟 白日無光 依依顔色 落月空樑 精棗安在 玉京杳茫 往訴帝座 天祖洋洋 五界苦暗 三宮吉祥 永離斯世 快集無彊 膽望天殿 我心悲傷 遙伸追儀 爲奠一觴 靈庶來格 福綠必降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3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113·203·206·210면
  • 고등경찰요사 113·115·117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78·149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6·27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369·383·390·402·414·416·5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10·364·368·426·451·452·5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50·772·779·78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461·462면
  • 동아일보(1923. 3. 6, 1926. 2. 26)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1·310·318·463·487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79·19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967·1001·1052·1053·1054·1055·1056·1059·1063·1078·1080·108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29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현천묵 호 : 백취(白醉) 함북 경성(鏡城) 3.1운동, 청산리전투, 삼부통합운동
본문
1862년 4월 9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那) 어랑면(演郞面) 부윤동(富潤洞)에서 아버지 현정눌(玄貞訥)과 어머니 울진 장씨(蔚珍張氏)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백취(白醉)이다. 연주현씨 판윤공파(延州玄氏判尹公派) 31세손이다.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현기준(玄機濬)·현학준(玄學濬) 두 아들을 두었다. 아버지는 관직에 진출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고, 집안 내력과 성장 과정 등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10세가 되던 해부터 사숙에 입학하여 22세까지 13년 동안 한문과 전통 학문인 유학을 수학했다. 1906년 3월 경성향교(鏡城鄕校) 내에 근대 교육기관인 보성학교가 설립되자 40대 중반의 나이로 학감을 맡으면서 학교의 주요 업무와 학생들을 관리·감독하였다. 한편 혁신유림으로 1908년 7월 대한협회(大韓協會)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었다. 다른 대한협회 회원들과 달리 경성의병을 지원하는 등 애국 계몽운동뿐만 아니라 무장 항일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09년부터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고, 동시에 경성향교의 직원으로 근무하며 보성학교와 경성향교를 이끌어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경 서울에 머물면서 형편이 어려운 고아원에 기부금을 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나철(羅喆)이 주도하여 창시한 단군교(檀君敎)에 입교하여 관련 활동을 하였다. 1910년 5월 경성향교 직원에서 해임된 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단군교의 후신으로 북간도에 본부를 둔 대종교(大倧敎)에 참여했다.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나서 의병 참모장이었던 김정규(金鼎奎)를 입교시키는 등 대종교의 교세를 확장하고 자리 잡는 데에 지대한 기여하였다. 1912년 10월 3일 대종교가 북간도에서 개천대경절(開天大慶節)을 맞았을 때 교주인 나철 다음으로 축사를 하였다. 대종교 포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족교육에도 매진하였다. 1912년 9월 대종교의 교육기관으로서 대종교의 북도본사가 위치한 허룽현(和龍縣)의 삼도구(三道溝) 청파호(靑波湖)에 청일학교(靑一學校)를, 10월에는 명신사(明新社) 이도구(二道溝) 왕분하(王芬河)에 동일학교(東一學校)를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에 노력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24일 옌지현(延吉縣) 이도구에서 주민 800여명을 지도하여 북간도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8월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결성하였다. 같은 해 10월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2월에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안에 따라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편되었다. 부총재에 선임되어 총재 서일 및 사령관 김좌진의 대리로 대한군정서의 실무를 맡으며, 군사 양성, 군자금 모집, 무기 구입 등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활동을 펼쳤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이후 일제의 보복에 의해 발생한 ‘경신참변’으로 많은 독립군과 교민이 학살당한 상황에서, 같은 해 10월 19일에 열린 홍범도 연합부대와의 연합회의에서 당분간 일본군의 공격을 피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추격이 가해진 상황에서 같은 해 10월 26일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전투를 승리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서 대한군정서 및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를 조직하였는데, 서일이 총재를 맡았다. 당시 부총재에 역임되었다. 1921년 4월 대한의용군총사령부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으로 개편되면서 부총재직을 그만두고 독립사상의 선전 및 동지 규합을 위해 북간도로 특파되었다. 1921년 6월 독립군부대가 러시아혁명파에게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한 자유시참변을 겪고 총재 서일이 1921년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대한군정서의 간부들과 회의를 소집하여 조직을 재정비하고 61세의 나이로 총재로 선출되었다. 대한군정서의 본부를 대종교 본당이 있는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겨 일제와의 직접 투쟁보다는 대종교 포교와 한인들의 교육에 매진해 나갔다. 한편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1923년 초 김좌진이 개최한 조선독립단대회에 대한군정서 대표로 참가하여 ‘기진회(期進會)’를 만들어 김좌진·김규식(金奎植)·이범윤(李範允) 등과 통일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로 1923년 9월 9개 단체로 통합된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었다. 남북만주에 소재한 각 단체에 서신을 보내어 더 많은 독립운동단체를 대한독립군단에 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1924년 3월 대한군정서를 재건하고 총재로 선출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재건을 위해 남북간도에서 군자금 모집, 무기구입, 사관학교 설립 등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또한 대한군정서의 무장조직인 고려혁명군과의 통합을 추진하여 4월에 개최된 조선독립당군정서연합회총회에 총재를 맡아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25년 1월에는 길림성 무링현(穆陵縣)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에 참석하여 북만주 독립운동단체 통일에 뜻을 모았다. 같은 해 3월 10일 대한군정서의 대표로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 북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체인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신민부로의 통합을 위해 대한군정서의 본부를 신민부 본거지로 둥닝현(東寧縣)에서 결정된 닝안현(寧安縣)으로 옮겼다.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과 사법기관인 검사원의 검사원장을 맡아 신민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고 무관학도 양성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1926년 초 신민부 대표로 이범윤과 함께 연해주 신한촌에서 열린 재만조선동포간부회의에 참석하여 상하이(上海) 임시정부·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정의부(正義府)·의열단(義烈團)·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등 대표들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대해 논의하였다. 같은 해 3월 중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의 대표로서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삼부 통합운동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3년 동양학원(東洋學院)의 부원장으로 김혁(金赫)과 함께 체포된 창립자이자 대종교 교주인 김교헌(金敎獻)의 장남인 김정기(金正琪)를 대신하여 동양학원의 운영을 맡았다. 그리고 이상룡(李相龍)이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1925년 9월과 1926년 10월 그를 임시정부 국무원에 선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해임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부총판으로 왕칭(汪淸)·훈춘(琿春)·둥닝(東寧)·닝안(寧安)·무링 일대를 관장하였다. 1927년 1월 15일 대종교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질(陞秩)되어 대종교인으로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병고 끝에 1928년 66세의 나이로 닝안현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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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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