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9. 2.
3. 1921년 9월 1일
4. 1922년이래 다년간
5. 1926년 10월
6. 1927년
7. 1945년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남 안주(安州) 사람이다. 평양(平壤)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재학중 1910년 3울 대상학교가 폐교되자 학업을 중단한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본격적인 대일(對日)투쟁에 나섰다. 이어 한국태(韓國泰)·함병승(咸秉昇)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이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주로 학생층을 상대하는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후 원산(元山)에서 최자남(崔子男)을 만나 최자남으로부터 강우규(姜宇奎)를 소개받아 강우규와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서 재등실(齋藤實) 총독을 폭살시키려는 강우규의 계획에 자신도 참여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강우규는 서울 남대문역(南大門驛)에서, 그는 서울 용산역(龍山驛)에서 대기하여 재등실 총독이 하차하면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그는 그후 한흥근(韓興根)에게 폭탄 입수를 부탁하였으나 연락이 서로 맞지 않아서 결국은 폭탄을 입수치 못하고 강우규의 거사 성공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1919년 9월 2일 재등실 총독을 향해 힘껏 폭탄을 던지고 다음날 찾아온 강우규를 만나 재거사를 의논하였다. 그러나 9월 17일 강우규가 서울 사직동 박승화(朴承華)집에서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그도 최자남(崔子南)과 함께 연루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8월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후 한흥근(韓興根)의 폭탄은닉혐의로 일주일도 못되어 다시 평양감옥에 투옥되었다. 예심 6개월 후 면소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922년 5월 동아일보(東亞日報) 안주지국(安州支局) 기자로 활동하면서, 안주청년회(安州靑年會)를 조직하여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야학교(夜學校)를 설립하여 부녀자들의 계몽에 힘썼다. 또한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東亞日報)·조선일보(朝鮮日報)·중앙일보(中央日報) 등의 안주지국장과 평양지국(平壤支局) 특파원을 역임하면서 언론계를 통한 민중계몽운동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1926년 10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허위로 꾸민 강중건(姜重建 강우규의 장남) 사건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로 그는 평북 정주(定州) 경찰서에 붙잡혀 의주(義州)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의 안주지회 부회장(安州支會副會長) 겸 정치부장(政治部長)을 맡아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추서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박은식전서(상) 63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53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16·13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9·214·42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8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347·3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2·84·583-6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