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5월 16일 일본헌병에 의하여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평양의 숭덕(崇德)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평양의 각급 학교 학생과 선생들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동년 만주로 망명하여 조재건(趙在健)·오학수(吳學洙)·지응진(池應振)·박영우(朴永佑) 등과 함께 안동현(安東縣)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안병찬(安秉瓚)·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 등을 주동으로 각지에 산재한 청년단을 규합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를 조직하고 편집부장이 되어 박춘근(朴春根)·김찬성(金燦星)·신경신(申敬信)·오능조(吳能祚)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일본주구배 숙청에 전념하였으며, 이에 일본군은 경비선 4척으로 압록강 연락선을 차단하고 육군 1개중대를 동원하여 이륭양행(怡隆洋行) 소속선(영국인 소유)까지 수색하였으나 허탕이었다.
동년 5월 3일 일경은 청년단연합회의 근거지인 홍통구(弘通溝)를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어 총살형이 집행되어 야산에 버려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은신 치료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안동현에서 일경에게 탐지되어 마침내 체포되었으며, 1921년 5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금고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3년 10월 20일 가출옥하였다. 출옥후 총상과 옥고의 여독으로 오래지 않아 별세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6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0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46·8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707·708·710·711·712·71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5·844·86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26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5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57·60면
- 박은식전서 상권 656·65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83·6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권 669·670·672·673·675·6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58·460·937·955면
- 동아일보(1923.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