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원산 보명학교(普明學校)를 마친 뒤 측량학교(測量學校)를 졸업하였던 그는 20세때부터 원산 홍도학교(弘道學校)에서 2세 교육에 힘쓰면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이동휘(李東輝)와 남공선(南公善)을 따라서 만주(滿洲)로 건너간 그는 만주에서 다시 러시아령인 해삼위(海蔘威)로 가서 신한촌(新韓村)에 들어가 한인거류민단장(韓人居留民團長) 채성하(蔡成河)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한편, 그는 국내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자 고향인 원산(元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함경도(咸鏡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 등을 오가면서 조병철(趙炳喆)·김장석(金章錫)·안돈우(安敦雨)·최자남(崔子南)·문무술(文武術)·김상익(金相翊)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일제 관공서 및 중요 생산시설을 파괴하기로 결정하고, 해삼위(海蔘威)에서 폭탄을 반입하여 원산 광석동(廣石洞) 야산에 묻어 놓고 거사의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1919년 7월 하순경, 최자남을 통해서 강우규(姜宇奎)의 방문을 받고, 그로부터 재등실 총독(齋藤實 總督)을 처단할 것이라는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 동년 9월 강우규가 서울 남대문역(南大門驛)에서 폭탄을 투척한 후 그는 곧바로 일경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청진(淸津)을 거쳐 국내로 빠져 나갔다. 후에도 북만주(北滿洲)와 노령(露領) 등지를 전전하면서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관헌을 습격하는 등 줄기찬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원산(元山)의 가족이 피신한 해삼위(海蔘威)에서 일본헌병대에 의해 붙잡혀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과 함흥감옥 등에서 옥고를 겪은 뒤 1925년 8월에 출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29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86·291·29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86·588·598·600면
- 동아일보(1921. 4. 18, 1921. 11. 6, 1926. 1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