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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3월 6일 충남 보령군 주산면(珠山面) 주야리(珠野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정제(定濟)이다.1919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충남 보령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보령 주렴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밤 충남 보령군 주산면 중산리 산 65-1번지, 해발 351m인 주렴산 국수봉에서 봉기한 만세시위를 가리킨다. 박윤화(朴奫和)·임문호(任文鎬)·박태현(朴台鉉)·김양제(金亮濟)·이철규(李哲圭) 등의 고장 출신 18의사가 국수봉에 태극기를 꽂고 봉화를 올리면서 징을 치고 독립선언문에 혈서하여 낭독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인 동생 김양제(金亮濟)와 더불어 만주로 망명하였다.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이 쏘배차(小白岔)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설치하고 민족 교육을 실시하자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백서농장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인력과 재력이 중심이 되어 1914년 가을에 착공되었다. ‘백서’라고 칭한 것은 이 농장이 백두산의 서편에 있기 때문이었다. ‘농장’이라고 명명한 것은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공개적으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중국인들이 금지하였기 때문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백서농장에는 신흥강습소와 신흥중학의 1회부터 4회 졸업생 일부와 각 지교(枝校), 노동강습소 등에서 훈련된 군인 385명을 입영시켜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를 통하여 독립 전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자 하였다.백서농장의 임원은 장주(庄主) 김동삼(金東三), 훈독(訓督) 양규열(梁圭烈), 총무인 그를 비롯해 의감(醫監) 김환(金煥), 경리 김자순(金子淳), 수품(需品) 곽문(郭文), 외무 정선백(鄭善伯), 농감(農監) 채찬(蔡燦), 교관 허식(許湜)·김영윤(金永胤)·김동식(金東植)·강보형(康保衡), 교도대장 이근호(李根浩), 제1중대장 안상목(安相睦), 제2중대장 박상훈(朴相勳), 부관 차용목(車用睦)·이수철(李壽喆)·김동진(金東振), 규율대장 신용관(辛容寬)·김일화(金日化)·김진혁(金進革) 등이었다.한편, 1920년 3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에 의하여 한족회(韓族會)와 군정부의 여준(呂準) 등 27명이 모인 가운데 회의를 한 결과 한족회의 조직을 변경할 때에 실업과장(實業課長)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상무사장(商務司長)으로도 활약하였다. 한족회는 1919년 1월 서간도의 류허현(柳河縣) 삼원포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한족회는 이주 한인의 산업 부흥을 위한 자치와 교육에 치중하면서 각 민족학교 및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을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군자금을 모금해 무기를 구입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 항쟁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한족회는 그 일환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전신이 되는 군정부(軍政府)도 건립하였다. 한족회가 건립한 군정부는 서로군정서로 이름을 고치고 임시정부의 산하 기관으로 독립 항전의 기능을 갖는 군정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는 사실상 하나의 기관처럼 운영되다가, 1924년 정의부(正義府)가 성립되면서 한족회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1921년 1월에는 왕칭현(汪淸縣)에서 대한독립군정서(大韓獨立軍政署)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1922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박길화(朴吉和)·김동진(金東鎭)·문장섭(文章燮)·문경섭 등과 함께 붙잡혀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1925년 10월 풀려나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의 박정조(朴正祚)·백남준(白南俊)과 함께 재만 한인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또한 1926년 1월 24일에는 고활신(高豁信)·김학선(金學善)·김탁(金鐸)·오대영(吳大泳) 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의부는 참의부·신민부와 함께 3부로 일컬어지며, 이들 두 단체와 함께 1920년대 중후반 한민족의 재만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정의부는 만주 내 무장 활동을 위한 모험대(冒險隊) 또는 암살대라는 명칭의 전투 부대와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한 모연대(募捐隊), 그리고 관할 지역 한인 사회의 자위를 목적으로 한 보안대 등으로 편성되어 이루어졌다.1927년 4월에는 만주지방으로 이주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김기풍(金基豊)·김진호(金鎭浩)·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현정경(玄正卿)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하여 산업 생산의 증가, 교육 발전, 위생과 보건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였다.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고향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963년 3월 17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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