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함경남도 홍원(洪原) 출신으로 일본 동경(東京)에서 거행된 2·8 독립선언 11명 대표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고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1910년 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일제에 의해 조국이 병탄(倂呑)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영어와 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오성중학교(五星中學校)를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유학생 단체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918년 4월 13일 기독교(基督敎) 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각 대학 웅변대회에 나가 러시아와 폴란드의 예를 들면서 조국광복의 희망을 강력히 역설하였다. 이후 그는 재일 유학생들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특히 조선유학생 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의 기관지로 발행되는 「학지광(學之光)」의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편집위원이던 최승만(崔承萬)과 독립운동에 관하여 상의하였다.
이 해 12월 1일 동경에서 발행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라는 영자신문에 실린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의 파리 강회회의의 기사와, 15일 조일신문(朝日新聞)의 샌프란시스코 교민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기사를 읽고 더욱 고무되었다. 이 해 12월 하순,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동경의 y.m.c.a. 강당에서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여, 그와 송계백(宋繼白)·백관수(白寬洙)·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최근우(崔謹愚)·김도연(金度演)·윤창석(尹昌錫)·김상덕(金尙德)·이종근(李琮根)·서 춘(徐椿) 등이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은 이광수가 작성하고, 자신은 대표가 되어 자필로 서명하고 영어와 일어로 번역하여 일본 조야(朝野)와 외국공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이 운동을 국내에까지 파급시키기 위하여 송계백을 국내로 보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 학우회 총회라는 명목으로 4백여 명의 유학생들이 동경 y.m.c.a. 강당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오전부터 수십 명의 정·사복 경찰을 그 곳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식은 거행되어 회장인 백남규(白南奎)가 개회선언을 하고, 그가 연단에 올라가 조선 청년 독립단을 발족할 것을 건의하여 찬성을 받았다.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서 춘이 연설하려 하자,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학생대표들을 모조리 검거하였다. 이 때 그도 체포되어 1년간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고향에서 정양하다가 서울로 이사하였으나, 계속되는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서 생활하다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9권 303면
- 고등경찰요사 16·151·152·153·155·27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48·651·655·659·660·664·669·84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68면
- 기려수필 235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96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7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21·124·126·128·132·133·134·135·137·163·24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9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85·411·41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