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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576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崔時興
이명 崔時豊, 金敬泰, 金景太, 崔聖彦, 崔靑山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가족관계창설일 2022-07-28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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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1919년 3월 독립선언 후(獨立宣言後) 의주(義州) 천마(山)에서 독립군(獨立軍)모집(募集)하고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평양감옥(平壤監獄)에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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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古寧朔面)의 천마산(天摩山)에서 최지풍(崔志豊)등과 함께 천마산대를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천마산에서 군사를 조련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만주 관전현(寬甸縣)의 광복군총영장(光復軍總營長) 오동진(吳東振)과 연결되어 광복군 천마산 별영대(天摩山別營隊)로 편입되었다. 1920년 7월에는 의주군 고령삭면에서 밀정을 처단하고, 평북 구성군 사기면(龜城郡沙器面)의 신시(新市)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의주에서 밀정 최학정(崔學貞)을 사살하였다. 동년 8월에는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여 의주의 옥상(玉尙)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단원 2백여명을 모집하여 무장시켰으며, 군자금 1만여원을 모집하였으나 일경의 포위가 좁아지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2년 겨울에 광복군총영에 합류하여 제4영장에 임명되었으며, 오동진(吳東振)·홍식(洪植)·최찬(崔燦)·김창곤(金昌坤) 등 다른 영장들과 함께 무장활동을 계속하였다.그후에도 대한통의부(統義府) 의용군 제3중대장에 임명되어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23년 9월에는 그의 부하인 최오산(崔午山) 등이 평안북도 회천군 북면 명문동 창참(熙川郡北面明文洞倉站)에 있는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전소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중 봉천성(奉天省) 임강현(臨江縣)에서 중국 경찰에 체포되자 오동진의 보고를 받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임강현장(臨江縣長)에게 교섭하여 봉천성 정부로 이관되었는데 일본측은 백방으로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하였다.그러나 중국 측에서 응하지 아니하자 일본 측은 신의주경찰서의 김덕기(金德基)를 파견하여 봉천성 당국에 "최시홍은 독립군이 아니고 만주개척단 사업에 공이 있는 자이니 석방을 요한다."고 속여 석방하게 한 후 체포하였다. 그는 3년여에 걸친 장기간의 재판 끝에 1924년 11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판결이 있었는데 후리후리한 키와 카이젤 수염에 큰 몸집으로 위풍당당하게 법정에 들어와 "조국의 독립은 우리 국민 모두의 희망이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사형이 확정되어 1925년 3월 11일 평양형무소에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1925년 3월 25일자 '독립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추도문을 게재하여 그의 순국을 애도하였다.

〈도 최장군(悼 崔將軍)〉최 장군은 이제 갔도다. 사계(斯界)의 모든 것을 뒤에 두고 훌훌(倏倏)히 먼길을 떠나갔도다. 아 장군이여, 한 많은 그 길을 떠남에 당하여 장군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피는 용솟음쳤으리로다. 아! 장군을 보내는 우리의 눈에는 열루(熱淚)가 그칠줄 모르고 흘러 내리는구나. 이 시대의 불행이냐? 조물의 시기이냐? 혁명의 건아 최장군은 이제 어디로 갔느냐? 시국은 다 망하고 원수는 도전하는데 장군은 이미 떠나갔도다. 장군이여! 5. 6년간 폭풍 처우(凄雨)에 그 혈전 고투를 이제 무엇으로 기념하랴? 장군의 호통에 원수는 전율하며 장군의 위세에 적군은 사산(四散)하고 장군의 칼날과 총알에 원수는 삼대같이 쓰러지도다.그러나 장군은 지금에 없도다. 피묻은 칼을 씻지 못하고 장탄(裝彈)한 총을 그대로 가지고 유인(裕仁) 취박(就縛)의 진중 첩보를 듣기도 전에 동경(東京)함락의 독립 호외를 보기도 전에 그만 이제 머나먼 길을 떠나갔도다.장군이여 천마 산중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주린 때는 얼마이었으며, 압록강두에 무주(無舟) 방황은 무릇 몇 번이었던가? 적진에 임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취하는 동지들의 용무(勇武)를 보고 웃기도 하였을지며, 적의 탄우(彈雨)에 동지가 거꾸러어질 때 울기도 하였을지로다.대계(大計)의 성공이 중도에 못미쳐 토병(土兵)의 무리한 발호(跋扈)는 왜 이리 극하며 원수의 독아(毒牙)는 왜 이리 강하냐? 40평생의 철천(徹天)의 한으로 형무대(刑務臺) 통부(通訃)는 웬일이며, 장성(將星)이 귀본(歸本)에 송사 무주(送死無主)는 이 무슨 애보(哀報)이냐. 이제 장군의 몸은 기성일우(箕城一隅)의 일부토(一抔土)로 동귀(同歸)할 것이며, 장군의 영양은 패수(浿水) 강상에 내거(來去) 방황하리로다. 아! 이것은 쾌남아의 불운이냐? 상도(常道)이냐? 장군이여! 속선(俗仙)이 비록 한계있다 하며, 영육(靈肉)이 비록 접어(接語)는 불능타 하나 장군의 영은 단손(檀孫)의 영이며, 오인의 육은 단손의 혈(血)이로다. 바라건대 장군의 영령은 한산수(漢山水)를 원리(遠離)치 말고 재생(在生)의 동지를 음우(陰佑)함이 있으면, 근원(槿園)의 강산에 왜적을 소탕하는 날, 일주(一炷)의 향을 사르고자 합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동아일보(1924. 11. 13, 11. 20)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1․259․263․272․431․442․48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85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14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407․709․556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65․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8․273․434․665․682․68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568․570․933․9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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