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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10336
성명
한자 金聿
이명 金律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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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1907년 기삼연(奇參衍)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친형(親兄) 김준(金準)과 함께 참여하였고 동년 10월 신덕순 의진(申德淳義陣)호군(護軍)으로 전북(全北) 정읍(井邑) 내장사(內藏寺) 일대에서 광주영(光州營) 진공(進攻)을 계획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유병기 의진(柳秉淇義陣)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었다가 분진(分陣)하여 전남(全南) 광주(光州), 나주(羅州) 등지에서 500여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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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나주에서 형인 김태원(金泰元;金準)과 더불어 거의한 뒤 기삼연(奇參衍)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후 분진(分陣)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같은 시기인 1906년 10월 5일 김 률은 형인 김태원과 함께 나주에서 봉기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기삼연의 문하생으로, 1907년 9월 기삼연을 중심으로 김용구(金容球)·김태원·이석용(李錫庸)·전해산(全海山)·심남일(沈南一)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에 가담하여 주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태원과 함께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0월 29일에는 고창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그곳 사창(社倉)을 점령하여 저장되어 있던 양곡을 압수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1월 3일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평(咸平) 순사주재소를 공격 점령하여 무기와 금품을 노획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월 22일에도 그는 기삼연 의병장과 합동하여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재차 함평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파다야(波多野) 순사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붙잡혀 순국한 뒤, 그는 김태원과 함께 기삼연 의진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며 광주 일원 곳곳에서 일본군을 유격전술로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는데, 특히 창평(昌平)에서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의 기병대를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3월 30일 그는 광산(光山)군 송정읍(松汀邑)에서 붙잡혀 4월 25일 전사한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도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73·76·77면
  • 전남폭도사(전남경무과, 1913) 8·14·15·33∼35·45면
  • 나주군지(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0) 150면
  • 나주군인물지(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1) 132면
  • 나주목지(정윤국, 1989) 6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3집 312·343·555·55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693면
  • 대한매일신보(1908. 5. 2)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1권 647∼650면
  • 죽봉청봉사적(필사본, 작성년도 미상)
  • 함평군사(함평군사편찬위원회, 1984) 403·40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37·61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639∼64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율 호: 청봉(靑峰), 이명: 김율(金律) 전라남도 나주(羅州) 전기의병, 후기의병
본문
1881년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문평면(文平面) 갈마지(渴馬池, 현 북동리)의 가난한 유생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청봉(靑峰)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율(律)을 사용하였다. 함께 의병활동을 펼친 의병장 김태원(金泰元), (金準)의 동생이다.박사(博士)라 불릴 만큼 문장과 글씨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학문적 사승(師承)관계는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07년 9월 기삼연(奇, 參衍)이 주도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결성에 가담한 점으로 보아 학문적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호남창의회맹소 총대장인 기삼연은 호남지역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했던 기정진(奇正鎭)의 재종질(再從姪)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물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면서 1896년 3월 삼종질(三從姪) 기우만(奇宇萬)이 광주에서 거병할 때 장성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참여하여 나주군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후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의 선유로 해산하고 고향에 내려가 은거하던 중 의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전주진위대 군사에게 붙잡혔다. 서울의 평리원(平理院)으로 이송되었으나 보름 만에 석방되었다.이러한 의병활동 경험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뒤이은 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의병이 재차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다시 의병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07년 9월 장성군(長城郡) 수연산(隨緣山)의 석수암(石水庵)에서 영광군(靈光郡)·나주군·함평군(咸平郡) 일대에서 활동하던 4~5개의 의병부대를 연합하여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될 때 가담하여 의병전쟁에 투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을 대장으로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를 비롯해 김준(金準)·이철형(李哲衡)·이남규(李南奎)·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김봉수(金鳳樹)·김엽중(金燁中) 등이 참여하였고, 선봉장(先鋒將)·중군장(中軍將)·후군장(後軍將)·좌·우종사(左)·(右從事)·총독(總督)·감기(監器)·좌익장·우익장·포대장(砲隊將)·포사장(砲射將)·호군장(犒軍將) 등을 둔 편제를 갖추었다.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를 맡은 김태원과 함께 고창·함평·영광 법성포 등의 공격에 앞장서며 활약하였다. 이후 군세를 확장하고자 의병부대를 분진(分陣)하기로 결정하면서 신덕순(申德淳) 의병부대의 호군(護軍)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김태원을 상장(上將)으로 백낙구를 후군장(後軍將), 조기영을 기포장(起砲將)으로 삼아 편성한 유병기(柳秉琪) 의병부대에 중군장(中軍將)으로 참여하였다.이후에는 독립된 부대를 이끌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김태원 형제의 행적을 기록한 『의중태산(義重泰山)』에 당시 사람들이 참봉(參奉)이라 호칭되던 김태원이 인솔하는 의병부대를 ‘참봉진(參奉陣)’, 박사(博士)로 불리던 김율의 의병부대를 ‘박사진(博士陣)’이라 불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당시 두 의병부대는 1908년 전반까지 호남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일제는 이들 부대를 “신출귀몰하여 군대와 경찰의 두통거리”라고 평하였다. 일본 경찰의 의병 탄압 기록인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도 이들을 ‘수괴(首魁)’와 ‘거괴(巨魁)’로 지칭하며 “기삼연과 더불어 형 김태원, 동생 김율은 1907년 11월부터 서로 호응하여 부대를 이끌고 함평군·장성군·영광군·담양군 등 각 군을 횡행하였고, 그 세력이 한창일 때 각각 부하가 200명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박사진과 형의 참봉진 두 부대는 여러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며 서로 연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10월 29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고창군(高敞郡) 읍성을 점령하였다가 형세가 불리하여 하루 만에 물러났다. 동년 12월 7일에는 영광군 법성포(法聖浦)의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였고, 그곳의 사창(社倉)을 습격해 양곡을 압수하여 군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일부는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1908년 1월 3일에는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함평주재소를 공격해 순사 2명, 우편 취급소장, 체류 일인 2명과 교전하여 소지품을 모두 노획하고 이들을 추적하다가 일본군 지원부대가 도착하자 나산으로 피해 다시 격전을 벌이다가 잠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22일에는 김태원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부대원 400여 명을 거느리고 다시 함평주재소를 공격하고 8시간에 걸쳐 수차례 동안 교전하여 하타노(波多野) 순사 등을 처단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나날이 기세를 떨치자 일제는 그를 포함하여 기삼연·김태원 등의 호남창의회맹소를 진압하기 위해 1월 25일부터 광주수비대의 전력을 강화하며 탄압작전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2월 2일 김태원 부대가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의 무동촌(舞童村)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의 기마병과 접전을 벌여 대대장 요시다 가쓰사부로(吉田勝三郞) 소좌(少佐)를 비롯해 카와미츠 누노타츠(川滿布建) 조장(曹長), 하야시(林) 상등병(上等兵)을 죽일 때 함께 협공하여 격퇴하였다.그러나 이 무렵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담양의 금성산성(金城山城)에 머물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수십 명이 희생되는 큰 타격을 받았다. 기삼연은 부상을 입고 겨우 피신하였지만 결국 1908년 2월 2일 붙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광주로 압송되어 정식절차도 없이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형을 당하였다. 기삼연 의병장이 서거한 뒤 호남창의회맹소는 표면상 해체되었지만, 김태원과 함께 ‘호남의소(湖南義所)’의 호남창의대장(湖南倡義大將)으로 불리며 의병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기삼연이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의병부대는 일제 침략의 첨병인 일본 군경과 일제 통치기구, 이주한 일본인 농민·상인에 대한 공격, 일제에 협력한 일진회원과 친일세력의 처단 등을 계속해 나갔다.이처럼 이들의 활동이 약화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일제는 제2특설순사대(第二特設巡査隊)를 편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비대와 헌병을 총동원하여 집중적인 탄압작전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함평군 월야면(月也面) 월야리(月也里) 죽산(竹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같은 달 29일 이마무라(今村)와 이쿠마(伊熊)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와 광주부(光州府) 소지면(所旨面) 정동(鼎洞,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1시간 동안 교전을 하다가 화순군(和順郡) 신기리(新基里)에서 결국 붙잡혔다.한편, 비슷한 시기 장성군 남면 토물([(土泉)]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며 활약했던 김태원은 1908년 3월 21일 장성군 광곡(廣谷)에서 부하 약 80명을 이끌고 잠복해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후퇴하여 암굴에 은거하였다. 그리고 밤을 틈타 탈출하여 나주군 박산촌(博山村)에서 지병을 치료하던 중 4월 25일 제2특설순사대와 일본군에 동향이 탐지되었다. 이에 부하 20여 명과 함께 광주 어등산(魚等山)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집중적인 총격을 받아 결국 목숨을 잃었다.김태원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형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연행되어 가던 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현장에서 총을 맞고 생을 마감하였다. 이로써 이들의 의병항쟁은 4월을 기점으로 종식되었다. 하지만 함평 출신으로 그의 부장으로 활약한 심남일(沈南一) 등이 의병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듬해인 1909년까지 전라도 지역의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제에 지속적으로 항쟁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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