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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洛必
이명 없음 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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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5 훈격 애국장
1908년 11월~1909년 4월 정성현(鄭聖玄) 의병진에 가담하여 전북(全北) 남원(南原)·임실군(任實郡)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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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정성현(鄭聖玄) 의진에 가담하여 전북 남원·임실(任實)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낙필은 이같은 시기에 정성현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1908년 11월 전북 남원군 아영면(阿英面) 및 임실군, 1909년 1~4월 임실군 구성리(九成里) 및 하운면(下雲面)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9년 11월 1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726·72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낙필 - 전북 남원(南原) 후기의병(정성현 의진)
본문
1885년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아영면(阿英面) 유도리(柳道里)에서 출생하였다. 평소 노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상인 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퇴위되고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국권 상실이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갔다. 전북 임실에서 정성현(鄭成鉉, 鄭聖連의 이명임)이 거의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자, 그곳으로 가서 참여하였다. 이후 의병장 정성현을 따라 이석용(李錫鏞) 의진에 합류하였다. 정성현은 우포장(右捕將)이 되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이석용은 1907년 9월 기삼연이 전라도 일대의 의병부대를 결집시켜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자 의병부대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을 맹주로 추대한 뒤 그해 10월 말부터 다음해 1월 말까지 치열한 항일 전투를 전개해갔다. 이들은 주로 장성, 영광, 담양, 고창, 함평, 무장 등 전라도 서부 지역을 활동무대로 하여 각 읍에 상주해 있던 순사주재소와 우편취급소 그리고 거류 일본인들을 습격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인해 1908년 2월 기삼연이 체포되어 사망한 뒤 여러 의병부대로 분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갔다. 이때 이석용 부대도 분진하여 독자적으로 소규모 유격전을 펼쳤으나 1908년 9월 임실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한 뒤 해산하였다. 이후에도 정성현 의병장과 함께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17명의 동료 의병과 남원과 임실을 오가며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동료 의병과 함께 총기를 들고 1908년 (음)11월 19일 전북 남원 아영면 망전리(望田里)에 거주하던 모씨(某氏)의 가택을 습격하여 총으로 위협한 뒤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같은 해 (음)12월에는 임실 기암리(奇岩里) 오참봉(吳參奉) 가택에 돌입하여 엽전 40냥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1909년 (음)정월 5일에는 임실 구성리(九成里) 이서방(李書房)의 집을, 같은 해 (음)4월 10일경에는 임실 하운면(下雲面) 박고개(박고치(朴高峙)) 소재 한사일(韓士一)의 가택을 습격하여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이처럼 동료 의병들과 함께 소규모 단위로 남원과 임실 일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추격해 오던 일본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09년 11월 10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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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강도 징역 15년 광주지방재판소전주지부 1909-11-1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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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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