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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으로, 이명은 계활(桂活)이고, 호는 백연(白淵) 또는 백연(白囦)이다. 생몰은 1885년 10월 7일부터 1921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특히 사망하였다고 알려진 1921년 이후에도 신문 지상에 활동 상황이 보도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만주로 이주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1년 대종교인들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종사하였다. 중광단은 지린성(吉林省) 왕칭(汪淸)현에서 활동한 대종교 독립운동 단체였다. 함일학교(咸一學校)를 졸업하고 대종교에 입교한 서일(徐一)을 단장으로, 현천묵(玄天默)·백순(白純)·박찬익(朴贊翊)·김병덕(金秉德)·채오(蔡五)·양현(梁玄)·서상용(徐相庸) 등과 더불어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중광단의 명칭에서 ‘중광(重光)’은 단군교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중광단의 건립 목적은 종교 활동보다는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무장 독립운동에 있었다.
중광단은 무기의 결핍으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게 되자 학교 교육을 통해서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높여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나철을 필두로 하여 서일·백순·박찬익 등과 함께 화룽(和龍)현 청파호 등지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5월 13일 대종교는 총본사를 청파호로 옮겼고, 옌지(延吉)·화룽·왕칭(汪淸)에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학교 건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중광단에서 건립한 대종교 계통의 학교들로는 동일학교(東一學校)·청일학교(靑一學校)·명동학교(明東學校)·용지학교(湧智學校)·의합천일학교(義合千一學校)·학성소학교(鶴城小學校)·양성학교(養成學校)·동화의숙(東華義塾)·동신학교(東新學校)·학성학교(學成學校) 등이 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북간도 지역에서도 반일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6일 왕현 백초구에서 김석구(金錫九), 구자익(具子益) 등과 함께 대종교인·기독교인·기타 학생·부인 등 1,200여 명이 모인 집회를 열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선언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자 간도의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간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대종교인들과 공교회(孔敎會)교인들은 대한국민회에서 탈퇴하였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하고자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조직하였다. 당시 대한정의단의 중심 인물들은 대종교 내에서 그를 비롯하여 서일·양현·채오 등이었다.
대한정의단은 본부를 왕현에 두고 산하에 5개 분단과 70여 개 지단을 설치하였는데, 단원은 약 1,600명에 달하였다. 애국 청년을 포섭하여 독립군을 편성하는 한편으로, 『일민보(一民報)』·『한국보(韓國報)』 등 독립운동 신문을 발행하여 항일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20년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을 쓰던 계봉우(桂奉瑀)가 『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자에 기고하여 북간도 상황을 전하면서, 대종교를 북간도에 전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는 정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교(宗敎)의 선포, 종교의 유입된 순서로 말하자면 거금(距今) 10여 년 전에 천주교(天主敎)가 시래(始來)하여 공소(公所)가 28처요 신도가 수천 인에 달하였는데, 혹 어떤 이는 애국지성(愛國志誠)이 매우 박약하다는 열평(熱評)을 하(下)하나 여(余)의 생각으로는 안중근씨(安重根氏)와 같은 무명 의사(義士)가 그중에 많이 은복(隱伏)한 줄로 확신한다. 그다음 천도교(天道敎)가 내(來)하여 교도 수는 아직 과다(夥多)치 못하나 사회와 교육에 헌신한 인사가 종래로 다(多)하고, 또 그다음 야소교(耶蘇敎)가 내(來)하여 교회가 120여 처에 신도가 5,000인 이상에 달하고 교회마다 학교를 설립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 하리만치 되었다. 차(此)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때부터 학교가 창립되는 데마다 야소신앙력(耶蘇信仰力)이 반드시 섬부(贍富)한 자를 선송(選送)하여 그 지방의 부형모매(父兄母妹)는 종교 교육하기로 하여 선교에 대착력(大着力)한 까닭에 학교 있는 곳에는 교회가 거의 다 설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회(會), 어떠한 사(事)든지 외인(外人)은 말하기를 야소교인의 회와 사라고까지 한다. 그다음 대종교(大倧敎)가 내(來)하여 나철(羅喆), 백순(白純), 박찬익(朴贊翊), 서일(徐一), 계화(桂和) 제씨(諸氏)가 선교에 대전력(大專力)하여 청파(靑坡)에 북도본사(北道本司)와 하동(河東)의 동도본사(東道本司)를 치(置)하고, 각처에 시교당(施敎堂)을 설(設)하여 교도가 몇천 명에 달하는데, 벽촌궁항(僻村窮巷)에 무무노농(貿貿老農)이라도 ‘한배검’이 누구신지 지(知)케 됨은 대종교(大倧敎)의 효력(效力)이 적지 않다.”
대한정의단은 청년 모집과 군자금, 그리고 무기가 어느 정도 준비되자 독립군 편성과 군사훈련의 과제가 절박하게 대두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종교 신도이면서 신민회 계통의 무관인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이장녕(李章寧) 등을 초빙하여 그들과 합작하였다. 그리고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결정에 따라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때 서간도의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계통이 중심이 되어 편성한 독립군 단체에 이미 서로군정서라는 명칭을 보내었으므로, 북간도의 대한군정서에 대해서는 이에 대비하여 공식 명칭인 대한군정서보다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명을 더 자주 이용하였다.
대한군정서가 조직될 때 총재 서일·부총재 현천묵·사령관 김좌진·참모장 이장녕·서무부장 임도준과 함께 부대 운영의 실질적인 핵심부서라고 할 수 있는 재무부장에 임명되었다. 아울러 간북(墾北) 북부총판재무관서의 재무관에 취임하여 동북 만주 교민의 자치 및 경제력 향상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졸업생으로 약 300명의 연성대(硏成隊)를 편성하였다. 연성대는 최정예 부대로서 대한군정서의 막강한 핵심 전투력이었다.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의 백운평전투와 천수평전투에서 일본군을 전면에서 섬멸한 것도 연성대였다.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청산리대첩 이후 북만주로 이동하여 러시아령 이만으로 들어가 1921년 3월 다른 독립군 부대들과 연합하여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조직하였다. 4월 1일 다시 대한독립군단이라고 개칭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사령관 겸 참모부장은 김좌진, 참모는 이장녕, 나중소(羅仲昭)가 맡은 것으로 보아 대한독립군단은 대한군정서가 핵심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 발생하여 노령으로 들어간 많은 독립군이 피해를 입었는데,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김규식·이범석 등은 이만에서 자유시행 열차가 떠나기 직전 군대에서 이탈하여 북만주로 돌아왔다. 이때 김좌진 등과 함께 만주로 되돌아왔다. 1923년 11월,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은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에 만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강국모(姜國模)·김병우(金秉愚)·김정의(金鼎義)·김혁(金爀)·김규식(金奎植)·김찬수(金燦洙)·김좌진·남상순(南相珣)·양재헌(梁在憲)·양규열(梁圭烈)·이범윤(李範允)·이경심(李景審)·이범석(李範奭)·박두희(朴斗熙)·배영선(裵永善)·조성환·최진동(崔振東)·현천묵(玄天默)·홍경진(洪景津)·홍충희(洪忠喜) 등 20여 명과 함께 발기하여 남북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새롭게 임원이 선출되었는데, 총재 현천묵(玄天默)·군사부장 조성환·서무부장 나중소 등과 더불어 재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김좌진을 중심으로 재건된 대한독립단이나 현천묵 중심의 대한군정서나 원래는 동일한 대한군정서에서 나온 것이므로, 두 단체는 북만주의 주민 대표들과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하여 1925년 3월 북만주의 군사 통일체로서 신민부(新民府)를 창립함과 동시에 대한군정서는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1928년 닝안(寧安)에서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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