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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97
성명
한자 權載昊
이명 權文八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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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2011 훈격 애족장
1896년 음력 1월 경북(慶北) 안동(安東)에서 안동의진(安東義陣)(김도화 의진(金道和義陣))의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어 동월 호좌의진(湖左義陣)(서상렬 의진(徐相烈義陣))의 안동지역 정착을 돕고, 부하 30명을 인솔해 소모활동을 전개했으며, 음력 2월 부하 200명을 인솔해 풍산(豊山)에서 열린 도회(都會)에 참여하고 예천(醴泉)에서 열린 회맹(會盟)안동의진(安東義陣)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동월 부하 250명을 인솔해 제2차 태봉전투(胎封戰鬪)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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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권재호는 경북 봉화 출신으로 1896년 1월 을미의병기 안동의병에서 권세연의진(權世淵義陣)의 중군장(中軍將), 1896년 김도화의진(金道和義陣)의 중군장(中軍將) 등을 역임하였다.

1896년 1월 21일 안동의진의 지휘부는 창의대장 권세연(權世淵),부장 곽종석(郭鍾錫, 미취임),중군장 유완(柳碗),선봉장 김옥서(金玉瑞),우익장 권용현(權用賢),좌익장 이운호(李運鎬),좌부장 이의호(李宜鎬) 등을 주축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1월 26일 안동과 예천의 접경지대에서 안동의진은 관군에 패하고, 이어서 1월 29일 일본군의 진격에 접전조차 못하고 와해되고 말았다.

1896년 3월 7일 대장 권세연은 조직을 보다 전투적인 체제로 개편하여 대장 권세연 이하 도총 유난영(柳蘭榮), 부장 김하림(金夏林), 중군 권재호, 도포장 오선전(吳宣傳) 등으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권세연의 지휘부 개편은 안동의진의 내부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그동안 흔들렸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2일 권세연은 전투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의병장을 사퇴하였다. 이튿날 김도화가 의병장에 취임하였고, 이어서 3월 14일 대장 이후 중군장 권재호,주장 유난영(柳蘭榮),도총 김하림(金夏林),선봉장 유시연(柳時淵),초모장 이충언(李忠彦) 유창식(柳昌植),아장 최세윤(崔世允),지휘장 김흥락(金興洛) 유도성(柳道性) 등으로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태봉전투(胎峰戰鬪) 패배 이후 안동부가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4월 초 안동의진은 재기를 위한 진용의 정비를 서둘렀다. 흥해의 최세윤(崔世允)을 좌익장, 영양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을 부장, 호좌의진의 서상열(徐相烈)을 군사, 이긍연(李兢淵)을 종사관, 그리고 권옥연(權玉淵)을 부장으로 임명하였다.

권재호는 안동의진의 창의 초기에 참여하여 권세연의진의 중군장과 김도화의진의 중군장을 역임하였다. 또 권재호는 호좌의진의 서상열이 경북 북부지역에서 전개한 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천회맹(醴泉會盟)에 안동의진의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예천회맹군의 태봉전투에 참가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處士權公事狀(작성시기 미상)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권 236면
  • 韓末義兵日記(국가보훈처, 2003) 160, 1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집 15~2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권재호 자 문팔(文八), 이명 권문팔(權文八) 경북 봉화(奉化) -
본문
1844년 11월 13일경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춘양면(春陽面) 의양리(宜陽里)에서 아버지 권정도(權精度)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문팔(文八)이며, 다른 이름으로 권문팔(權文八)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896년 1월 권세연(權世淵)의 안동의진(安東義陣)에 참여하였다. 1895년 8월 을미사변과 같은 해 12월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1월 20일 안동의진의 창의장으로 추대된 권세연은 부장 곽종석(郭鍾錫), 중군장 유완(柳碗), 선봉장 김옥서(金玉瑞), 우익장 권용현(權用賢), 좌익장 이운호(李運鎬), 좌부장 이의호(李宜鎬) 등을 주축으로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1월 26일 안동과 예천의 접경지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안동의진은 관군에 패하고, 1월 29일 일본군의 진격에 접전조차 못 해보고 와해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권세연은 태백산 구마동(九麻洞)으로 들어가 가산을 내어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의병진을 수습하여 안동부를 공략함으로써 2월 25일 안동부에 무혈 입성하였다. 같은 해 3월 7일 대장 권세연이 조직을 보다 전투적인 체제로 개편할 때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안동의진의 간부진은 대장 권세연 이하 도총 유난영(柳蘭榮), 부장 김하림(金夏林), 도포장 오선전(吳宣傳) 등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권세연의 지휘부 개편은 안동의진의 내부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그동안 흔들렸던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2일 권세연은 의병부대를 개편한 후 돌연 전투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의병장을 사퇴하였다. 1896년 3월 13일 의병장에 취임한 김도화가 3월 14일 지휘부를 개편하고 진용을 정비할 때에도 다시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대장 이하 부장 유난영, 도총 김하림, 선봉장 유시연(柳時淵), 초모장 이충언(李忠彦)·유창식(柳昌植), 아장 최세윤(崔世允), 지휘장 김흥락(金興洛)·유도성(柳道性) 등과 함께 지휘부에 편성되었다. 그리고 안동의진이 3월 26일 예천회맹(醴泉會盟)에서 7읍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3월 29일 함창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군 병참 부대를 공격하였던 태봉(胎峰) 전투를 중군장으로서 지휘하였다. 그러나 태봉 전투에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패배하였다. 김도화의 안동의진은 4월 25일 봉정사(鳳停寺)에서 진영을 재정비하였는데, 지휘부에서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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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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