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20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姜士文
이명 姜判烈, 姜龍彦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98 훈격 애국장
1908. 1월 김태원[김준](金泰元[金準]義陣)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동년(同年) 3월 전남(全南) 장성(長城)에서 100여명의 군사(軍士)규합, 독자적으로 거의(擧義)하여 의병장(義兵將)으로 전남(全南) 광주(光州), 화순(和順), 창평(昌平), 담양(潭陽), 장성(長城) 등지에서 부일배(附日輩)를 응징하는 등 활동하였으며, 1909. 3. 4 창평군(昌平郡) 연천(蓮川)에서 일경(日警)교전(交戰)하여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일단 해진(解陣)한 후 재거의(再擧義)를 모색하던 중 피체(被逮)되어 1909. 12월 사형(死刑)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남 장성(長城) 사람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여 갔다. 나아가 급기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강사문은 1908년 김태원(金泰元:일명 金準)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김태원의병장은 1907년 기삼연(奇參衍)의병장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다가 분진하여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고 전남 나주(羅州)·함평(咸平)·장성(長城)·무안(茂安) 등지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한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사람이다. 특히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순사를 처단하고 수십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접전하여 천단 조장(川端 曹長)을 사살하는 등 의세를 떨쳤다. 또한 법성포(法聖浦)에 주둔한 일본군을 화공(火攻)으로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강사문은 이와 같은 김태원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3월 전남 장성에서 100여 명의 군사를 규합, 독자적으로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전남 광주(光州)·화순(和順)·창평(昌平)·담양(潭陽)·장성 등지에서 부일배를 응징하고 일군과 교전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1909년 3월 창평군 연천(蓮川)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교전 끝에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의진을 일단 해진한 후 재거의를 모색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같은 해 12월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70·71·7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484·538·64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卷 557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686·840·841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사문 강판열(姜判烈) 전남 장성 -
본문
1876년경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외동면(外東面) 옥동(玉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강판열(姜判烈), 종교는 기독교이다. 대장간업과 산포수를 하다가 1908년 1월 28일 김태원(金泰元, 일명 김준(金準))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항일전을 펼쳤다. 김태원 의병장은 김돈(金燉)의 권유로 1907년 11월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이 장성 수연산(隨緣山)에서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합류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기삼연과 김태원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의병이 일어나지 못하고 훈련되지 않은 의병들을 대부대로 운용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판단, 의병부대를 나누어 분산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김태원 의병부대는 1908년 (음)2월 2일 설날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의 무동촌(茂洞村)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를 요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일본 군경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크고작은 진압 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요시다(吉田勝三郞) 수비대대의 한 부대가 무동촌에 접근하자 김태원 의병부대는 무동촌 돌담에 의지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이후 전남의 나주(羅州)·무안(茂安)·장성(長城)·함평(咸平) 등지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처럼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김태원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2월 14일 독립하여 자택으로 돌아가 군사와 총기 40정을 모았다. 이어 장성군 구산리(口山里)에 100여 명의 의병이 결합한 이모(李某) 부대와 합동하여 112명의 의병과 총기 80정을 얻어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총대장(總大將)이 되었다. 그해 3월 3일부터 항일전을 펼친 의병부대는 주로 전남의 광주(光州)·담양(潭陽)·장성·창평(昌平)·화순(和順) 등에서 부일배(附日輩)를 응징하고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9년 3월 14일 새벽 창평군 연천(蓮川)에서 일본군 광주순사대(光州巡査隊)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부하 5명, 총기 5정을 잃고 자신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어 일단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총기 66정은 동군(同郡)의 땅에 묻어 숨기고 재거의를 모색하였다. 1909년 6월 8일 장성군 학림(鶴林)에 있었는데, 그해 7월 29일 장성군 외동면 옥동의 주막에서 광주헌병분견소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으며, 1909년 12월 17일 광주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1909년 10월 27일 자 일본군 임시 한국파견대 사령부에 의하면, 활동지는 석실장[石實場 : 전남 곡성군 죽곡면 동계리]과 흥양(興陽)이었고, 부하는 100명이었다. 그의 의병 부대에 참여한 조문섭(趙文燮)은 1908년 (음)12월 9일 약 20명의 의병과 함께 화승총 13정을 지니고 전남 광주군 한치면(漢峙面) 원우리(遠隅里) 송모(宋某)에게서 쌀 25석을 군량미로 획득하였다. 나진삼(羅進三, 광주군 가마보면 복룡촌)·이광숙(李光淑, 광주군 신기리)·이기언(李基彦, 장성군 내동면 고산리)·황화중(黃花仲, 광주군 거정리)도 부하였는데 미상(米商)으로 가장하고 광주군의 큰 시장에 출입하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 서우범(徐禹凡)도 부하로 확인되는데 1909년 6월 장성군 갈동리(葛洞里)에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강사문(관리번호:10020)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