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남 장성(長城) 사람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여 갔다. 나아가 급기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이와 같은 시기에 강사문은 1908년 김태원(金泰元:일명 金準)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김태원의병장은 1907년 기삼연(奇參衍)의병장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다가 분진하여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고 전남 나주(羅州)·함평(咸平)·장성(長城)·무안(茂安) 등지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한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사람이다. 특히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순사를 처단하고 수십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접전하여 천단 조장(川端 曹長)을 사살하는 등 의세를 떨쳤다. 또한 법성포(法聖浦)에 주둔한 일본군을 화공(火攻)으로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강사문은 이와 같은 김태원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08년 3월 전남 장성에서 100여 명의 군사를 규합, 독자적으로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전남 광주(光州)·화순(和順)·창평(昌平)·담양(潭陽)·장성 등지에서 부일배를 응징하고 일군과 교전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1909년 3월 창평군 연천(蓮川)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교전 끝에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의진을 일단 해진한 후 재거의를 모색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같은 해 12월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70·71·76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484·538·64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3卷 557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686·840·84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