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31
성명
한자 黃覺
이명 黃介民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1916년 일본(日本) 동경(東京)에서 김철수(金綴洙) 등과 함께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 당원으로 활동하고, 1919년 이후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 회원, 구국일보(救國日報) 주필, Y.M.C.A.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하여 항일 연설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황줴(黃覺)는 1916년 일본 도쿄에서 김철수(金綴洙) 등과 함께 신아동맹당을 결성하였다. 신아동맹당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세우기 위해 중국과 한국이 동지가 되어 활동할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이후 상하이로 무대를 옮기는 한편 단체명을 대동단(大同團)으로 고치고 중국 국민당과 연계하여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1919년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참여하였다. 신아동제사는 1912년 신규식 등이 신해혁명 후 중국 측 인사들과 협력하여 설립한 단체였다. 중국과 한국 양 국민의 우의와 친선을 도모하고 나아가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신아동제사의 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성립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이후에도 『구국일보(救國日報)』 주필, Y.M.C.A. 편집인 등으로 활동했다. 수차례에 걸쳐 3.1운동 기념식에 참석하여 항일투쟁과 한국독립과 관련된 연설을 하였다. 특히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각별한 우의를 가지고 한국과 중국의 연대를 통한 항일투쟁과 한국독립을 위해 진력을 다하였다.

황줴의 한국독립과 한중연대에 대한 의지는 매우 공고한 것이었다. 그는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국광복을 위해 분투하시는 선생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전부터 중한 두 민족은 형제와 같은 관계로 긴밀히 협조하여 어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지금도 또한 형제처럼 힘을 합쳐 노력해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별집 2집 397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7) 16권 156면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1991) 20권 18~19면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지나각지(在支那各地)(4)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상해지방(在上海地方)(5)
  • 사진출처:백도백과(百度百科)(황개민(黃介民):http://baike.baidu.com)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황각(관리번호:100031)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