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미국의원단이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05년 미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선천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11년 10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구속되고, 자신도 이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선교 본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15년 1월 12일 부흥회 등에서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평안북도 경찰부장에게 불려가 ‘훈계’를 들었다.
1919년 2월 초 학생독립운동을 고민하던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원벽(金元壁)이 찾아와 이 문제에 관한 견해를 묻자 “모든 일이란 실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저 고려만 하고 있어서는 무슨 일이고 성취되는 일이 없다”고 대답하여 김원벽의 결단을 돕고 격려했다. 3월 8일 선천에서도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군경(軍警)은 이를 진압하고자 한국인들을 탄압하였다. 이를 목격한 그는 당시 상황을 친필로 기록하여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잡지사로 보내 게재했다.
1920년 9월 1일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의거를 하다가 체포된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致毅)를 변호하여 ‘온량한 학생으로 결코 폭탄을 던질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관헌들의 고문에 마지못해 자백했을 것’이라는 고문설을 유포시켰다.
1935년 11월 14일 개최한 평양남도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야스타케(安武直夫) 지사는 회의를 개회하기 전에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자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鄭益成),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H. M. Lee, 李希滿)와 함께 그런 일은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상 그 지시에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1936년 1월 18일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날로 숭실학교장직, 1월 20일에는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를 취소시켰다. 3월 21일 안식년에 해당하는 해이기도 하여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4월 초순경 미국에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들러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비판하였다. 본국에 귀국해서도 일제에 대한 비판 강연과 기고를 계속했다. 그해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 자문위원을 맡으며,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8년 1월호 『프레스비테리안 트리뷴(The Presbyterian Tribune)』지에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목으로 신사참배 절대불가론을 게재하여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학교 유지를 위해 ‘신사참배 순응’을 주장하던 언더우드(H. H. Underwood)와 논쟁하였다. 1941년 12월 4일 시카고 장로회병원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1990) Ⅱ 109면
- 신한민보(新韓民報)(1919. 4. 19, 1921. 3. 21, 4. 7, 5. 12, 6. 23, 8. 18)
- 합방(合邦) 청원에 관한 민심에 대해 평양분대장(平壤分隊長) 보고(1909. 12. 15) (통감부문서, 국사편찬위원회, 1999) 제8권 120~121면
-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George S. McCune(The Presbyterian Tribune, January 20, 1938)
- 식민권력과 종교(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2) 115~1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