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충청남도 부여(扶餘) 사람이다.
그는 향리 부여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등 면학에 열중하다가 나라의 형세가 어지러워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권회복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7년 대종교 교도로 만주에 건너가 북간도 연길현(延吉縣) 동불사(銅佛寺) 천영학교(天英學校) 교사가 되어 제2세 민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20년 1월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재 서일(徐一)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조력하였다. 이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庭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부여의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해 가지고, 만주에 돌아와 서무부장 김택(金澤)에게 수교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 확충자금모집 차 임시정부 발행 공채 35,000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이에 함북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을,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을,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을 각기 동지로 영입하고 동년 9월 부여에서는 문장섭(文章燮)·김재설·김삼현·문경섭 등의 동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군자금 모집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강경(江景)에서 김찬형(金燦亨)·김철수(金哲洙) 등을 영입하는 한편 이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였다. 이해 10월에는 상경하여 동생 강용구(姜鎔求) 집에 은신 활동하면서,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김정제(金廷濟)·조창호(趙昌鎬)·김목현(金穆鉉) 등을 다시 동지로 확보하고, 부호가택을 은밀히 방문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뒤 다시 고향 부여로 내려가서 군내 각면을 순방하고 군자금의 필요성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애국활동을 소상히 설명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곳에서 동지 박창규·박남규와 이기범(李基範)으로 하여금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각 면에 다니면서 소화시키도록 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모금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동불사 상양리(上陽里)에서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 만주 동경성(東京城)에 대종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재만 독립운동의 거물로 지목되어 동년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한 나머지 1943년 목단강성(牧丹江省) 가목사(街木斯)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09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3면
- 동아일보(1932. 4. 1)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97, 800, 80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