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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우정(雩汀)이고, 창씨명은 상김동렬(商金棟列)이며, 김동렬(金棟烈) 혹은 김동렬(金東烈)로도 표기되었다. 1926년 3월 15일 경상남도 산청군(山靑郡) 신등면(新等面) 평지리(坪地里)에서 태어났다. 1948년 10월 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판결에 따르면 생년이 1923년 2월 28일로 추정된다. 「범죄인파산선고자명부(犯罪人破産宣告者名簿, 新等面)」에는 1923년 3월 15일 생으로 기재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에 일제 경찰에 쫓기던 독립운동가 정태옥(鄭泰玉)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정태옥은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앙청년동맹(中央靑年同盟)과 경성목공조합(京城木工組合)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31년 11월 중순부터 국제공산청년동맹(國際共産靑年同盟) 동양부위원회(東洋部委員會)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1932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의 재건 방침을 규정한 「조선 공청(共靑, 공산청년회의 약칭) 청년 제군에게 고함(일명 ‘1월 서신’)」이라는 테제를 가지고 귀국하기도 하였다. 이후 1930년대에 인천(仁川)과 서울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을 주도했으며,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1937년 6월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2월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정태옥이 1942년 5월 11일 복역 중 사역(使役)을 나갔을 때 간수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탈출하였다. 5월 12일 김용환(金用煥)과 서울 돈암정(敦岩町)에서 잡담을 나누던 도중에 도주한 정태옥이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국방복(國防服)과 돈 등을 제공하였다. 당시 정태옥은 한국의 독립과 사회주의 실현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자고 했는데, 이에 찬성하여 정태옥의 피신을 도왔던 것이었다.
정태옥에 대한 지원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942년 7월 12일 동대문경찰서에 검속(檢束)되었다. 같은 해 1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범인은피죄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광복 이후 진주(晋州)와 산청 일대에서 문학자, 언론인, 문화예술운동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진주 시인협회(詩人協會)에서 박목월(朴木月) 등이 동인(同人)으로 참여했던 동인지(同人誌) 『등불』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8년에는 첫 시집 『조춘(早春)』을 발간하였으며, 2003년에 시집 『생애의 창변(窓邊)』을 출간하였다.
1947년부터 1960년까지 경남일보사경남일보(社)에 재직하며 편집국장, 논설위원, 전무 등을 지냈다. 1970년대에는 농협중앙회(農協中央會) 산청군 조합장(組合長)을 역임하면서 1976년 2월에는 농협중앙회 대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산청의 지리산평화제(智異山平和祭) 대회장, 진주의 개천예술제(開天藝術祭) 대회장 및 제사장, 진주의 남명학연구원(南溟學硏究院) 이사, 진주문화원(晋州文化院)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농촌상록상, 개천예술제 공로상, 진주예술인상, 진주시민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8년 5월 5일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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