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457
성명
한자 金德男
이명 金成川, 川村德男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일본방면 포상년도 1998 훈격 애족장
1940. 6~7월 일본(日本) 경도시(京都市) 하경구(下京區)의 철공소에 근무 중 유귀복(柳貴福), 김두만(金斗萬) 등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고 혈서(血書)로 항일독립의지를 다진 후 항일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한 결과 백두산(白頭山)을 근거지로 삼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키로 하고 귀국하여 이의 실행을 준비하다가 1941.5월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고 1년 10월여(月余)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40년 일본 경도시(京都市) 하경구(下京區)의 철공소에서 근무 중, 일본인의 민족차별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11일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으로 노동일에 종사하던 김덕남은 일본인의 민족 차별을 체험하면서 점차 항일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그리하여 1940년 6월 같은 처지에 있던 동료 김두만(金斗萬), 제약회사 직공인 유귀복(柳貴福) 등과 서로 뜻을 함께 하고, 백두산을 근거지로 삼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고, 이를 위한 방안으로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약화된 틈을 노려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같은 해 9월 11일 그들은 재차 회합을 가져, 먼저 김두만을 국내로 보내어 독립운동에 필요한 제반 준비를 서두르기로 하고, 귀국후의 연락방법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사전에 일경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42년 9월 26일 대판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昭和特高彈壓史(明石博隆·松浦總三編) 中卷 206∼210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2卷 810·811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3輯 326∼328·699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3卷 792∼794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덕남 김성천(金成川), 천촌덕남(川村德男) 경상남도 울산(蔚山) 조선독립혈맹
본문
1919년 10월 4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농소면(農所面) 창평리(倉坪里, 현 울산광역시 북구 창평동)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성천(金成川) 이다. 일제말기에는 일본식 성명강요로 천촌덕남(川村德男)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34년 11월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노동자로 생활하며 민족 차별을 겪고 한인을 대하는 모욕적 태도에 분노하며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교토(京都)의 다이와철공소(大和鐵工所)에서 일하던 중, 1940년 6~7월 경 동료 직공 김두만(金斗萬)에게 민족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같은 해 8월 이후 동료 직공 유귀복(柳貴福)을 주축으로 하는 비밀결사에 합류하였다. 1940년 9월 다이와철공소 내에서 유귀복·김두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결심하는 내용의 「서서(誓書)」와 「불변서(不變書)」를 작성하였다. 서서에는 일신일가(一身一家)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빨리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결심을 천신(天神)과 산신(山神) 앞에 맹세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불변서에는 그 의지가 변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였다. 서서와 불변서에는 손가락을 베고 피로 지장을 찍었다. 이들은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는 독립을 달성해야 하며,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으므로 동지를 모아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활동 거점을 국내에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백두산에 근거지를 만들 준비를 시작하였다. 옷 등을 팔아서 백두산 입산에 필요한 자금을 함께 모았다. 태극기를 만들 흰 천과 약, 등산용 칼, 수첩, 지도 등을 구입하였다. 자급자족 생활을 위한 취사도구와 쌀, 보리 등의 종자도 준비하였다. 1940년 9월 중순 김두만이 먼저 국내로 출발하였다. 출발 직전 유귀복과 함께 교토역 앞 음식점에서 모여 성공을 기원하며 배웅하였다. 2주 후에 국내로 들어왔다. 유귀복 또한 회사를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김두만의 본적지인 경남 의령에 모여 20일 간 체류하며 백두산 입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실행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교토와 오사카(大阪), 고베(神戸)로 흩어질 때, 교토로 갔다. 1941년 5월 16일 김두만이 혈맹한 서서를 가지고 있다가 오사카에서 체포되었고, 그로 인해 다음 날인 5월 17일 교토에서 체포되었다. 1941년 10월 16일 오사카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2년 9월 26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덕남(관리번호:6457)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