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5월 18일 일군에 강제 입대한 승영호(承永祜)·노능서(魯能瑞)와 함께 중국 서주(徐州) 교외 주둔 일본군 전부대(傳部隊) 치중대(輜重隊)의 철조망을 뛰어넘어 탈출하였다. 이들은 며칠을 주야로 걸어서 안휘성(安徽省) 임천(臨泉)에서 학병출신 제1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간부훈련반(幹部訓練班)을 찾았으며 감격적으로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동년 10월 졸업한 그는 지대 본부에서 신참 동지의 군사 훈련과 광복군 제3지대 창설에 주역을 담당하여 활약하였다.
1945년 3월에는 잔류학병 등과 함께 지대 본부에서 편제(編制), 교육(敎育), 훈련(訓練), 정훈(政訓)을 분담하여 제3지대 창설의 기간장교로서 주역할을 전개하였다. 또한 훈련교본과 구호제정(口號制定)을 손수 만들어 대원들의 군사훈련을 담당하여 불요불굴의 필승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뒤 일제의 항복으로 최전방에 위치하였던 제3지대는 본부를 서주로 이동, 계속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1948년 4월 6일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를 제5기생으로 졸업하고 서울지구 헌병대 헌병대장으로 복무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년 6월 28일 서울지구 신세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1권(1994년 발간)
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1944년 5월 18일 일군에 강제 입대한 승영호(承永祜)·노능서(魯能瑞)와 함께 중국 서주(徐州) 교외 주둔 일본군 전부대(傳部隊) 치중대(輜重隊)의 철조망을 뛰어넘어 탈출하였다. 이들은 며칠을 주야로 걸어서 안휘성(安徽省) 임천(臨泉)에서 학병출신 제1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간부훈련반(幹部訓練班)을 찾았으며 감격적으로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동년 10월 졸업한 그는 지대 본부에서 신참 동지의 군사 훈련과 광복군 제3지대 창설에 주역을 담당하여 활약하였다.
1945년 3월에는 잔류학병 등과 함께 지대 본부에서 편제(編制), 교육(敎育), 훈련(訓練), 정훈(政訓)을 분담하여 제3지대 창설의 기간장교로서 주역할을 전개하였다. 또한 훈련교본과 구호제정(口號制定)을 손수 만들어 대원들의 군사훈련을 담당하여 불요불굴의 필승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뒤 일제의 항복으로 최전방에 위치하였던 제3지대는 본부를 서주로 이동, 계속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1948년 4월 6일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를 제5기생으로 졸업하고 서울지구 헌병대 헌병대장으로 복무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년 6월 28일 서울지구 신세계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寫眞(第1戰區幹訓分團附設 韓國光復軍訓練班 第1期 畢業官生合影紀念 : 1944. 10. 22)
- 長征(金俊燁, 1987. 8. 15) 219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410·412·420·421·424·427·432面
- 寫眞(韓光班 時節 농구선수인 車若島)
- 長征六千里(韓光班學兵同志會, 1979. 7. 26) 36·39·41·42·46·118∼120·123·132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