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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760
성명
한자 李錫庸
이명 李學士, 李學者, 호:靜齋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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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2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서기 1907년 8월26일 진안(鎭安)서 하여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고 동 9월 12일에 왜적(倭敵) 굴구원태랑(掘口源太郞)(銃)으로 쏴서 팔을 부러지게 하고 전투 장비(戰鬪裝備) 수천 건(數千件)을 불태웠다 또한 용담 심원사(龍潭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 의병(義兵)합진(合陣)하여 산중(山中)에서 내려온 (敵)10여명을 격살(擊殺)하였고 1908년 봄에 남원(南原)에 진출하여 적추장3명을 격살(擊殺)하고 왜죄십조(倭罪十條)대서(大書)하여 각 거리에 게시(揭示)하였고 그 후 남원(南原), 전주 등지(全州等地)를 중심으로 여러번 전투(戰鬪)하였고 아군(我軍)사상(死傷)도 많았다.
순종(純宗)상류(上琉)하여 보호조약(保護條約) 폐기(廢棄)적신(賊臣)의 참주를 (請)하였다.
2. 1913년 겨울에 임실서 체포(逮捕)되어 전주(全州), 대구감옥(大口監獄)에서 악형(惡刑)을 받고 1914년 4월 4일에 사형(死刑)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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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늑결에 이어 1907년 8월 강제로 군대해산을 당하는 등 날로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이 심해지자, 거의토적(擧義討賊)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 낼 것을 결심하였다. 동지를 규합하고 병장기를 준비하여 1907년 8월 26일 진안(鎭安)에서 거의(擧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즈음 정재는 다음과 같은 격중가(激衆歌)를 지어 의병들의 사기를 고무하였다.

가을바람 소슬하니 영웅이 득의하는 때로다.

장사가 없을쏘냐 구름같이 모여든다.

어화 우리 장사들아 격중가를 불러보세.

한양 성중 바라보니 원수놈이 왜놈이요. 원수놈이 간신이라.

삼천리 우리 강산 5백년, 우리 종사 어찌할까.

아마도 의병을 일으켜 왜놈들 몰아내고 간신을 타살하여 우리 황제 받들고 우리 백성 보전하여 삼각산 숫돌되고 한강수가 띠 되도록 즐기고 놀아보세.

우리 대한 만만세

진안 석전리에서 기병한 정재의 진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의병대장 이석용

총 지휘 박갑쇠·곽자의·임종문

선 봉 박만화·최덕일·송판구

연 락 홍윤무·박성무·윤병준

중 군 여운서·김운서·김성학

도로부장 김사원·김공실·김성율

후 군 김사범·윤명선·김성학

보 급 한규정·박금동·박문국

참 모 전해산·한사국·이광삼

운 량 오기열·조영국·김학문

1907년 9월 영광(靈光)의 수연산(隨緣山)에서 성재 기삼연이 호남창의진을 편성하고 대장으로 추대되자, 자신은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전수용(全垂鏞, 海山) 등과 같이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의진의 명의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일병 1인을 살해하거나 생포하면 일백냥을 줄 것을 약속하는 현상을 걸어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을사오적을 주참할 것을 간청하였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에 투고하여 거의한 취지를 밝히고 국민의 협조를 요청하고 진군을 개시하였다. 9월 12일 밤 고창(高敞)의 일본 병참(兵站)을 습격하고 왜적 굴구원태랑(掘口源太郞)을 총으로 쏘아 팔을 부러뜨리고, 이들로부터 전투장비 수천 건을 탈취 소각하였다.

한편 용담(龍潭)의 심원사(深源寺)에서 김동신(金東臣) 의진과 합세하여 의병 삼백여 명을 영솔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왜병과 접전하여 적 수십 명을 격살시켰다. 1908년 1월 2일 성재가 순창(淳昌) 복흥산(福興山)에서 적에게 패전하고 체포당하여 광주의 서천 백사장에서 순국하자 의진은 다시 분진(分陣)하게 되었다. 이에 정재는 다시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남원(南原)으로 진출하여 적의 장교 3명과 졸병 다수를 격살하였다. 이어서 '왜죄 10조(倭罪十條)'를 크게 써서 거리거리에 붙여 놓고 황제께 상소하여 기왕의 모든 불평등조약을 폐기할 것과 매국매족한 을사오적을 주참할 것을 간청하였다.

그 후 남원·전주 등지를 중심으로 왜적과 수차례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한편 아군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1908년 9월 임실 전투에서 적에게 크게 패한 후 의진을 해산하고 잠행 유랑하다가, 1913년 겨울 임실에서 한인 형사 김대형(金大亨)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소위 살인·방화·강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914년 1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았다. 다음은 재판장과 정재간의 1문 1답의 대략이다.

(문) 한문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답) 사서오경과 제가백가서를 많이 읽었다.

(문) 재산이 있는가·

(답) 내가 한사(寒士)인데 무슨 재산이 있겠는가.

(문) 무슨 목적으로 폭도가 되었는가·

(답) 너희들 일인을 배척하기 위해서이다.

(문) 영솔인원이 삼백 명이라고 하니 정말인가·

(답) 그렇다.

(문) 조선이 일본과 합병이래 천황폐하의 은혜가 망극하여 일반신민이 환희하니 너도 충실한 신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답) (크게 웃으며), 차라리 대한의 계견(鷄犬)이 될지언정 너의 나라 신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문) 소위 의병명색으로 인명을 살해하고 촌가에 방화하고 공금을 강탈하니 이 무슨 불법이냐·

(답) 대한(大韓)을 배반하고, 부일(附日)하는 자는 죽일 것이요. 공금(公金)이란 대한의 국세(國稅) 인즉 국왕이 버린 돈을 신하가 줍고, 애비가 버린 돈을 자식이 줍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무슨 불법이란 말인가·

(문) 그러면 왜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다니었는가·

(답) 시세가 불리함으로 시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문) 스스로 의사(義士)요 충신(忠臣)이라 하면서 일이 되지 않을 줄 알면 죽을 뿐인데 왜 구구히 살아서 이런 욕을 보는가·

(답) 너희들이 어찌 나의 안 죽는 까닭을 알 것이냐· 예전 제갈공명(諸葛孔明)은 6차례나 기산(기山)에 나오고, 강유(姜維)가 9차례나 중원(中原)에 나온 것은 모두 안될 줄 알지만 몸이 다 마르고 죽을 때까지 한함이니 내가 당당한 국사(國士)로 뒷날을 도모할 것이어늘 어찌 자살하겠느냐·

(문) 창의록(倡義錄)을 장황하게 저술한 것은 무슨 소용이며, 불망록(不忘錄)은 무슨 의미인가·

(답) 창의록은 충분(忠憤)을 못 이겨 너희 정부에 보낼 것이요, 불망록은 내가 거사한지 5~6년에 우인에게서 다수한 보조를 받았으므로 훗일에 보상하고자 함이다.

(문) 사실심문은 끝났으니 최후로 자기에게 이익될 말이 있으면 진술하라.

(답) 내가 이제 피집되었으니 속히 죽일 것만 바라지 무슨 자기 이익될 말이 있겠느냐· 다만 원한 된 일은 안중근(安重根)이 이등(伊藤博文)을 죽였는데 나는 사내(寺內正毅)를 못 죽인 것과 우리나라의 오적(五賊)과 7적(賊)을 못 죽이고 또 동경(東京)과 대판(大阪)에 방화 못한 것뿐이다.

(재판장) 선고를 내릴 터이니 기립하라.

(정재) 기립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나는 원수에 대해 경의를 표할 수 없다.

이때 강제로 일으켜 세우니 정재는 크게 노하며 '나의 마음은 불기(不起)다' 하자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하고 나갔다. 정재는 이에 불복공소(不服公訴) 하였으나 공소가 기각되어 1914년 4월 4일 37세의 혈혈 청년으로 대구형무소에서 교수되어 순국하였다. 정재는 생전에 전쟁터에서 많은 우국시를 지어 우국충정을 달래었으니 그 중 한수(首)를 들면 다음과 같다.

"붉은 피 파랗도록 원한이 치미니

밤마다 잠못 들고 쓰린 가슴 문지르네

원수놈 목을 베어 말머리에 달고 와서 간대 끝에 매달아 남대문에 꽂고 말리"

(突血·天碧劒痕 枕邊不睡痛胸門 野馬獨夫將繫頸 梟我懸我國市南門)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01·602면
  • 항일민족시집(신동근) 114·115면
  • 정재창의록
  • 호남의병략전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방화, 상해모살, 강도, 강도상인 사형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 1914-02-07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방화, 상해모살, 강도, 강도상인 공소(控訴)기각 대구복심법원형사부 1914-03-0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방화, 상해모살, 강도, 강도상인 상고(上告)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4-04-16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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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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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묘역 소충사 28의사합동묘 전라북도 임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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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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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오열사 충혼탑 전라북도 고창군
2 비석 운현전적 의혼 추모비 전라북도 임실군
3 비석 호남창의동맹단 의병 위령비 전라북도 진안군
4 사당 대한이산 묘 전라북도 진안군
5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6 기념관 소충사 전라북도 임실군
7 생가 이석용의병장 생가 전라북도 임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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