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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240
성명
한자 梁漢默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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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08년 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894년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삼십삼인 중(三十三人中) 1(人)으로서 검거되어 1919년 5월 26일 옥사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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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남도 해남(海南)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33세에 탁지부 주사(度支部主事)에 임명되었다가, 37세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하던 중,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孫秉熙)를 내량(奈良)에서 만나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1904년(광무 8)에 노일전쟁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권을 되찾고자 하여 동경(東京)에서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조희연(趙羲淵) 등과 만나 보국안민의 방책을 협의 결정하고, 국내에 훈령하여 이용구(李容九)로 하여금 진보회(進步會)를 주관케하여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1905년(광무 9)에 귀국하여 친일파로 변절한 이용구에 대항키 위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고,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총부(天道敎總部)를 설치하자, 그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에 취임하였으며, 1909년(융희 3)에는 법도사(法道師), 1911년에는 직무도사(職務道師)를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손병희·오세창·권동진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약속하였다. 2월 27일에는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 등의 동지와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金尙奎)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있는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심한 고문으로 56세의 나이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1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649·663·66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479·55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0·103·443·45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6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788면
  • 조선독립운동년감 1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0·76·9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양한묵 호 : 지강(芝江) 자 : 경조(景朝), 길중(吉仲) 전남 해남(海南) 이재명의 이완용 처단의거, 3·1운동
본문
1862년 4월 29일 전남 해남군(海南郡) 옥천면(玉泉面) 영계리(永溪里)에서 아버지 상태(相泰)와 어머니 낭주(郞州) 최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자는 경조(景朝) 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이다. 10대조 이래로 능주(綾州)에서 해남으로 옮겨 세거한 향반이었다. 전통적인 유학을 공부하였고, 18세 이후에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천주교와 음양술에 관한 서적도 널리 읽었다고 한다. 20세에 결혼하여 나주 남평면(南平面) 송촌(松村)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전국의 명산과 사찰을 돌면서 우주의 근본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당시 피폐한 현실사회에 대한 인식도 갖추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92년 관직에 나아가 1894년에는 탁지부(度支部) 주사에 임명되어 능주세무관으로 부임하였으며, 1897년경 사직하였다. 그 뒤 베이징(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일본에서 이상헌(李祥憲)이라는 변성명으로 망명 중이던 동학교주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손병희가 국내 정부대신에게 동학의 공인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상서를 보냈으나 오히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고조되자, 동학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였다. 이에 일본 체류의 동학지도부는 1904년 7 · 8월을 전후하여 국내의 동학세력을 진보회(進步會)라는 이름으로 전국에서 조직하게 하고 이용구(李容九)를 책임자로 삼았다. 이즈음 일본에 있던 손병희의 명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진보회 관련문제를 처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용구가 일본군의 비호를 받던 일진회와 제휴하자, 이에 반발한 그는 그해 12월 일진회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공진회에 참여하였다. 공진회가 해산된 뒤에는 반일진회적인 성격이 강한 헌정연구회(1905년 5월 조직)에도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헌정요의(憲政要義)』의 서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1905년 8월경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 등 일본체류 동학지도부와 교단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12월 동학이 천도교로 개편됨과 동시에 손병희로부터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천도교의 근대적 체계를 갖추기 위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 작성을 지시받았다. 그러나 이 일을 실제로 맡아 행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1906년 1월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부는 귀국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해 종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2월 집강(執綱)으로 우봉도(右奉道)와 현기사(玄機司) 진리과원(眞理課員)에 임명되었다. 이어 1907년 4월에는 현기사장을, 1910년에는 진리관장 등의 직무를 보았다. 현기사장은 천도교 전반에 대한 문제와 교리를 담당하는 총무기관의 책임자로 1910년까지 몇 개월을 제외하고는 그 일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귀국 직후 손병희로부터 교서(敎書) 편찬 임무를 부여받고 10여종의 교리서를 편찬하였다. 이처럼 초기 천도교의 핵심 간부로 교단을 운영하면서 교리 정리와 체계화에 가장 뚜렷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호남학회의 창립에 적극 관여하였고, 대한협회에도 참여하였다. 천도교의 지도부는 정교 분리를 내세우고 1906년 8~9월 일진회와 결별하였으나, 정치 · 사회문제에는 전직 고관 출신인 권동진, 오세창 등을 표면에 내세웠고, 교회문제는 주로 그에게 맡기는 형태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李完用) 처단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그가 체포될 때, 천도교에서는 그를 현기사장직에서 신설된 진리관장으로 옮기게 하였다. 진리관은 천도교 중앙총부의 기구를 개편하면서 교리문제와 관련된 현기사 진리과를 폐지하고 신설하였던 것인데, 주로 담당한 사업은 진리 강해 · 교서 저술 · 역사 편찬 · 교리 설명 · 윤리 제정 · 공첩 작성 등으로 주로 교리문제와 관련된 기구의 책임을 맡겼다. 석방 직후인 1910년 4월 손병희는 각지 교인들에게 49일 기도를 지시하고, 양한묵 등과 과천 관악산 삼성암에서 수련기도회를 가졌다. 그해 5월 손병희의 지시로 일시 향리로 돌아가 있었는데, 정양을 위해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이후 도사로 있으며 두드러진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1912년 발간된 상당수의 교리서가 그의 저술로 알려져 있어 교리연구에 대한 위치는 여전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1910년대 초부터 이돈화(李敦化)와 같은 새로운 교학자들의 대두는 그의 위치가 전과 같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1917년 천도교 중앙총부 안에 교리연구부가 설치되어 도사를 비롯한 원로들이 교리연구를 하게 되자, 여기에서 크게 활동하였다. 『천도교회월보』 1918년 4월호부터 연재된 『교리연구부』의 교리 논의에 그가 주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합병 이후 교회의 중심에서 멀어진 후, 도사의 직임을 가지고 원로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한시를 짓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천도교회월보』에 발표한 한시만도 80편을 넘었다. 1919년 3 · 1운동 발발에 앞서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천도교측에서 서명한 인물은 15명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교회의 원로였다. 3 · 1운동으로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된 지 2개월 뒤인 1919년 5월 26일 향년 56세로 옥중 순국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옥사였다. 유해는 현재의 금호동인 수철리(水鐵里)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922년 5월 천도교측의 주선으로 화순군 도곡면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1920년 5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참석 하에 상해거류민단 주최로 양한묵 등 순국제열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천도교인 신숙(申肅)은 『고 양한묵선생의 역사』를 읽었다. 천도교의 기본사상으로 ‘인내천(人乃天)’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로서,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종교의 발전을 사상의 변화와 진화로 이해하는 동시에 기존의 보수적인 동학교도들을 의식하여 교리서에는 ‘유불선(儒彿仙) 합일’과 ‘성경신법(誠敬信法)’과 같이 전통 동학교리를 오히려 강조하여 윤리 · 도덕적인 실천덕목들을 신앙의 방법으로 내세웠다. 또한 교리서들을 통하여 손병희 중심의 교권 확립에 진력하여 교주들의 호칭을 대신사(大神師) · 신사(神師) · 성사(聖師)로 정착시켜 신비주의적인 권위로 천도교를 장악하는데 일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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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전라남도 화순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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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비석 삼일 민족대표 양한묵선생 추모비 전라남도 화순군
3 기타 봉황각 서울특별시 강북구
4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5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6 비석 지강 양한묵선생 순국비 전라남도 해남군
7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8 비석 해남항일운동 추모비 전라남도 해남군
9 조형물 지강 양한묵 선생 추모탑(조형물) 전라남도 화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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