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임헌근은 1942년 5월 3,000명의 청년들과 함께 '군속'이라는 명목으로 연합군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부산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은 1,400명의 한인 청년들은 1942년 9월 14일 인도네시아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에 도착하였다.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근무하던 임헌근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인 동료들과 연합군을 돕는 항일운동 조직을 결성하기로 계획하였다. 당시 임헌근은 이억관(李億觀),김현재(金賢宰)와 협조하고, 자카르타지구에서는 문학선(文學善), 세마랑지구에서는 이상문(李相汶), 암바라와지구에서는 손양섭(孫亮燮),조규홍(曺奎洪) 등이 접촉하였다.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 교육대에서 재훈련을 받던 한인 군속들은 1944년 12월 29일 교육대 취사장 뒤편에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고려독립청년당의 조직은 총령에 이억관, 군사부장에 김현재, 조직부장에 임헌근, 세마랑지구 책임자에 이상문, 암바라와 지부장에 손양섭, 암바라와 부지부장에 조규홍, 자카르타 지부장에 문학선, 자카르타 부지부장에 백문기, 반둥 지부장에 박창원, 반둥 부지부장에 오은석 등이 선임되었다.
고려독립청년당 결성 이후 1945년 1월 4일 중부 자바 암바라와에서 당원 손양섭이 규합한 민영학(閔泳學),노병한(盧炳漢) 등 세 명이 일본군,군속,어용상인을 사살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암바라와의거 후 일본군은 한인 군속들의 저항이 또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대규모의 전속을 실시하였다. 이때 고려독립청년당에서는 딴중 쁘리옥 항구에 정박 중인 수송선을 탈취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일본군에 발각되어 고려독립청년당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1945년 1월 28일 총령 이억관이 체포되었으며, 싱가포르에서 압송된 임헌근 등은 5월 24일 군사법정에 송치되었다.
임헌근은 1945년 7월 21일 자카르타의 일본군 제16군 군사 재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인 9월 4일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在쟈바 反日高麗獨立靑年黨과 세 義士(安承甲, 1957) 41~43, 67~76, 87~88, 90면
- 鬼倉典正의 서신(당시 군법회의 재판 검찰관, 1964. 2. 8)
- 고려독립청년당사건 확인 결과 통보(외무부장관, 1977. 4. 7)
-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2006) ⅳ 352~353, 365~370, 375, 377면
- 연합군전쟁범죄조사위원회 제출 참고자료(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전쟁문서보관소 소장 자료, 1946)
- 朝鮮日報(1947. 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