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신돌석은 경북 영해군 남면 복평리(寧海郡 南面 福坪里 현 盈德郡 丑山面 釜谷洞)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은 평산(平山)으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지만, 영해(寧海)에서 그의 문중은 서리(胥吏) 즉 중인 집안이었고 그의 집은 영해부 아전(衙前)에서도 밀려나 갓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한 신분으로서도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힐 수 있었다. 또한 날랜 행동과 담용(膽勇)으로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돌석은 부친과 아우 태범(泰範)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한 서민출신 의병장(義兵將)으로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의 고향인 영해지방은 농민들에 대한 봉건적 수탈에의 저항으로서 '이필제(李弼濟)의 난'이 일어난 고장으로, 이곳의 농민들은 봉건적인 체제에 저항하는 기질이 강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신돌석은 15세에 이미 사방으로 유람하며 자신의 뜻을 펴 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 많은 인사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와 교류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가 패기에 찬 큰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루는 평해(平海) 월송정(月松亭)에 올라가 기울어 가는 국운을 근심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누(樓)에 오른 길손은 갈 길을 잊고 단군의 터전에 낙목(落木)이 가로놓여 있음을 탄식하네. 남아 二七에 이룬 일이 무엇인고. 잠시 가을 바람에 의지하니 감개가 새롭구나. 登樓遊子却行路 可難檀墟落木橫男子二七成何事 暫倚秋風感慨生"
이와 같은 우국지정(優國之情)이 동학농민운동을 겪고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1896년 평해(平海)에서 기병하였다. 이곳 일대는 일찍이 사귀어 온 동지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의지하고 따랐다. 때로는 의병들이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를 두려워하자 신돌석은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적병을 수없이 사살하여 용맹을 사방에 떨쳤다. 이리하여 평해 일대에는 일본병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1896년 말 영해군의진(寧海郡義陣)의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그러나 불길같이 일어난 전국을 휩쓸었던 을미 의병은 대체로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기 때문에 정부의 선유(宣諭)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받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시기 신돌석 의진과 같은 평민들로 구성된 의진은 아직 조직적이지 못하였고 대중적 기반도 튼튼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돌석 역시 훗일을 기약하여 의진을 해산하고 10여 년간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그후 그는 경상도 일대를 주유하면서 청도(淸道) 지방을 지날 때 일본 공병들이 전선 가설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였다. 순간 국토 강탈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달려들어 공병 5명을 때려눕히고 전주를 뽑아 버렸다. 그 후 일본인의 거점인 부산으로 잠입해 들어가 일본 상선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영해 일대는 을미의병이 해산한 뒤에도 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 민란의 무리를 화적(火賊) 또는 활빈당(活貧党)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란은 신돌석의 청도·부산에서의 활동과 사회사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배경속에서 신돌석은 을사의병을 평민부대로 재편하여 경북 동북부 일대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되자 이미 을미 의병 때 거의한 바 있던 이인영(李麟榮)·이강년(李康秊)·이은찬(李殷瓚) 등이 재차 강원도 일대에서 기병하였다. 신돌석은 1906년 3월 13일(음) 아우 우경(友慶)과 함께 영덕(盈德) 복평리(福坪里) 축산(丑山)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대장기를 세우고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 되었다. 가산(家産)을 흩어서 의병을 모으니 그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 신돌석은 먼저 군율을 정하여 군사들의 기강을 엄숙히 한 다음, 이웃 고을인 진보(眞寶)의 이하현(李夏鉉), 영덕의 정용기(鄭鏞基) 그리고 이한구(李韓久) 등의 의진과도 연락하여 유기적인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는 영해읍을 거쳐 평해읍(平海邑), 울진읍(蔚珍邑)을 행군하며 병력을 점차 증강시켜 갔다. 인근 일대에 그의 명성이 크게 떨쳐 그를 따르는 군사가 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또한 영양(英陽)·청송(靑松)·의성(義城)·봉화(奉化)·삼척(三陟)·정선(旌善)·강릉(江陵)·원주(原州) 등 경북·강원도 일대의 의병활동을 자극하여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적병이 그 일대에 집결하였다. 또한 대구·원주·경주 등지의 진위대(鎭衛隊) 주둔 병력도 출동하였다. 이들은 공동작전을 펴 가며 남쪽에서부터 역습을 꾀하고 있었다. 대장 신돌석은 적의 대공세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신속하게 대처하였다. 의병부대를 이끌고 태백산맥의 산악 지대를 이용하여 적의 집중 공격을 피하고, 혹은 해안선을 따라 적을 유격하면서 다시 영해 지방으로 내려왔다.이때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을 붙여 수령의 죄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본관(本官)이 애국선정(愛國善政)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3가지의 큰 죄가 있다. 막중한 의병진을 효유한다고 하면서 감히 대의(大義)에 항거하니 그 죄가 하나요, 병정을 청하여 빌었다가 의병진을 치려 하니 그 죄가 둘이요, 왜학(倭學)을 설치하여 사람을 무도한 지경에 빠지게 하려 하니 그 죄가 셋이다. 이러므로 대의 명분에 의하여 토벌을 받을 것이다."
신돌석은 영해 읍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성중에서는 성벽에 총 구멍을 뚫고 힘을 다하여 대전하였지만, 당해 내지 못하고 영덕 지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신돌석 의진의 이와 같은 기세에 놀란 적은 종래 서울 이북 수비에 전력하던 수비대를 나누어 서울 이남 각 요지에 배치하게 하였으며, 또 대구·경주 진위영(鎭衛營)의 병정들을 영해 지구로 급파시켰다. 그러나 신돌석 의진은 경상북도·강원도의 동해안 지구로 왕래하면서, 기민한 활동으로 적을 궁지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해 11월에는 일월산(日月山)·백암산(白岩山)·대둔산(大遯山)·동대산(東大山) 사이로 군사들을 옮기고 요해지를 의지하여 자유 자재로 유격전을 전개하니, 대부대의 정규군으로 구성된 적군은 이들의 뒤를 추격하느라 많은 병력을 낭비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영동·영서(嶺西)에 주둔하던 일군들은 '신돌석 의병 부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1907년 봄에 중군장인 백남수(白南壽)와 김치헌(金致憲) 등 용감한 휘하 장령들과 함께 영덕 일대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협력을 얻어 가면서 진용을 보강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하여 의진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 갔다. 이때 신돌석 의진은 울진 매화리(梅花里)로부터 영해 수동(壽洞)으로 돌아와 다시 많은 의병을 소모하여 영덕의 관서를 격파하고 원구(元邱)에 주둔하였다. 다시 사현(笥峴)으로부터 청부역(靑鳧驛)에 이르렀을 때 그의 군사는 3,000여명에 달하였다. 9월 15일 영양(英陽) 주곡(注谷)에서 일군 1종대(縱隊)와 격전을 벌였다. 적병이 물러가자 신돌석 의진은 10여 일간 이곳에 머물면서 흩어진 주민들을 불러들여 구국 항쟁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는 일본의 강압적인 군대 해산 후이었으므로 구한국군들이 신돌석 의진에 합류하여 군세를 크게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돌석은 의진을 이끌고 진보(眞寶)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일찍이 이하현(李夏鉉)이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협력하여 적을 격파하고 청송(靑松)으로 갔다. 이곳 부사인 안종덕(安鍾悳)에게 구국을 위한 항일운동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주의 동북 대산성(岱山城)에 이르러 일군과 수일간 격전하였다. 이때 왼쪽 엄지손가락에 총탄을 맞았으나,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적과 대전하였다. 그후 청하(淸河)로 돌아갔다가 다시 영덕 새며루(鳥硯)에 이르러 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대동(大洞)에서 소를 잡아 향응을 베풀어 군졸들을 위로하였다.
10월 영해로 들어가 경무서를 격파하고 일경을 추방한 후 수동(壽洞)으로 들어가 군량을 모으고 군졸들을 휴식시켰다. 이때 이인영(李麟榮)의 의진을 중심으로 연합 의진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으며,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양주(楊州)에서 합진하자는 이인영의 격문이 신돌석에게 전달되었다. 신돌석은 대오를 정비하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양주로 향하였다. 허위(許蔿), 민긍호(閔肯鎬), 권중희(權重熙), 방인관(方仁寬), 정봉준(鄭鳳俊), 이강년(李康秊), 문태수(文泰洙) 등의 의진이 호응하여 왔다. 이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신돌석은 교남의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돌석은 비록 의병장으로서 용맹을 떨치기는 하였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양반 유생출신의 다른 의병장과 나란히 앉을 수 없었다. 당시 의병장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전개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반 봉건운동 계열의 천민출신 신돌석은 박정빈(朴正斌)이 그대신으로 대치되었다. 그뿐 아니라 백제·홍범도·김수민 등 각처에서 용맹을 드날리던 천민 의병장들도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11월에 있었던 서울 공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08년 정월 신돌석은 의진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평해(平海)로 들어가 독곡(獨谷)의 일군을 섬멸시키고 2월에 영양읍에 주둔하였다. 이즈음 적의 대군이 투입되었다. 신돌석은 그것에 대비하여 수비(首比)·흥안(興安)·울진(蔚珍)·강릉 일대의 의병부대를 합진하여 대장이 되었다. 안동 춘양면(春陽面)을 거쳐 삼척 소봉동(小鳳洞)에서 일군을 섬멸하고 무기·군수품을 탈취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7월에 의병활동을 재개하여 평해 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영해 희암(喜巖)에서 적과 격전을 벌였다. 10월에 의진을 거느리고 안동 재산면(才山面)을 거쳐 영양 금정여점(금丁旅店)에 이르렀을 때 일군과 맞부딪쳤으나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에 엄동을 맞이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게 되자, 다음해 봄에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일단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신돌석의 활약상에 대하여 1908년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 "···혹은 독립하고 혹은 다른 집단과 영합하여 영양·영덕 지방을 근거로 하여 본도 북부는 거의 횡행하지 아니 한 곳이 없다. 그는 경찰대·수비대·헌병대에 의하여 토벌 당한 일이 수십 차례였으나 실로 출몰이 자재(自在)하여 용이히 체포되지 않고 지금도 오히려 영양 지방에 출몰하여···" 일제는 무력으로 신돌석을 제압시킬 수 없음을 알고 회유책을 쓰기로 하였다. 그에게 끊임없이 도장관(道長官)의 맹서니, 통감의 편지 같은 것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일제는 다시 그의 아내를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고 권유서를 주어 돌려보냈다. 그는 아내를 크게 꾸짖고 권유서를 불태웠다.
의병을 해산한 후, 가족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영덕 눌곡(訥谷)에 이르렀을 때 길에서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金相列)을 만났다. 김상렬의 간청으로 그의 집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김상렬 형제의 음모에 빠져 독주(毒酒)를 마셨다. 신돌석이 쓰러지자 김상렬의 3형제가 합세하여 도끼로 쳤다. 1908년 12월 12일의 일이었다. 이러한 참담한 소식을 전해들은 지방민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청하에 살던 한 사기장수가 지고 가던 짐을 내던지며, "세상사가 다 됐네. 우리가 이렇게 구차하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신 장군이 왜놈을 쓸어 내고 우리를 구해 낼 줄 믿었더니 이제는 다 틀렸네." 하고 통곡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부친 석주와 아우 태범(泰範)이 신돌석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활약하다가 태범은 오히려 연루자가 되어 수개월 투옥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호서의병장 이강년이 그의 용감성을 칭송하면서 "참으로 장사(壯士)다. 나는 그렇지 못하니 물러가고 당신을 추대하여 양도 도의장(兩道都義將)으로 삼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연합 의진에서 소외시킨 것은 한말 의병운동의 한계성이었고, 그 때문에 구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민족에게 망국의 한을 남겨 주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1권 338·339·340면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68·72면
- 고등경찰요사 6·7·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91·505·506·507·574·5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13·389·390·391·411·412·413·414·417·416·679·574면
- 황성신문 광무10년 6. 21, 6. 30, 7. 1, 12. 8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55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