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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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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2946
성명
한자 申乭石
이명 申泰乙, 申泰浩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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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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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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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06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후에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켜 용감하게 적병을 다수 격멸(擊滅)했으며 영남(嶺南) 의병장(義兵將)중 가장 유명해서 왜경(倭警)중상(重賞)을 걸고 잡으려하니 그 고종(姑從) 김자성(金自聖)이 자기집으로 유인하여 삼형제가 도끼로 격살(擊殺)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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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신돌석은 경북 영해군 남면 복평리(寧海郡 南面 福坪里 현 盈德郡 丑山面 釜谷洞)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은 평산(平山)으로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지만, 영해(寧海)에서 그의 문중은 서리(胥吏) 즉 중인 집안이었고 그의 집은 영해부 아전(衙前)에서도 밀려나 갓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한 신분으로서도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힐 수 있었다. 또한 날랜 행동과 담용(膽勇)으로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돌석은 부친과 아우 태범(泰範)과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한 서민출신 의병장(義兵將)으로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의 고향인 영해지방은 농민들에 대한 봉건적 수탈에의 저항으로서 '이필제(李弼濟)의 난'이 일어난 고장으로, 이곳의 농민들은 봉건적인 체제에 저항하는 기질이 강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신돌석은 15세에 이미 사방으로 유람하며 자신의 뜻을 펴 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 많은 인사들과 사귀게 되었는데 그와 교류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가 패기에 찬 큰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루는 평해(平海) 월송정(月松亭)에 올라가 기울어 가는 국운을 근심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누(樓)에 오른 길손은 갈 길을 잊고 단군의 터전에 낙목(落木)이 가로놓여 있음을 탄식하네. 남아 二七에 이룬 일이 무엇인고. 잠시 가을 바람에 의지하니 감개가 새롭구나. 登樓遊子却行路 可難檀墟落木橫男子二七成何事 暫倚秋風感慨生"

이와 같은 우국지정(優國之情)이 동학농민운동을 겪고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1896년 평해(平海)에서 기병하였다. 이곳 일대는 일찍이 사귀어 온 동지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의지하고 따랐다. 때로는 의병들이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를 두려워하자 신돌석은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적병을 수없이 사살하여 용맹을 사방에 떨쳤다. 이리하여 평해 일대에는 일본병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1896년 말 영해군의진(寧海郡義陣)의 중군장(中軍將)이 되었다. 그러나 불길같이 일어난 전국을 휩쓸었던 을미 의병은 대체로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기 때문에 정부의 선유(宣諭)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받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시기 신돌석 의진과 같은 평민들로 구성된 의진은 아직 조직적이지 못하였고 대중적 기반도 튼튼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돌석 역시 훗일을 기약하여 의진을 해산하고 10여 년간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그후 그는 경상도 일대를 주유하면서 청도(淸道) 지방을 지날 때 일본 공병들이 전선 가설 작업을 하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였다. 순간 국토 강탈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달려들어 공병 5명을 때려눕히고 전주를 뽑아 버렸다. 그 후 일본인의 거점인 부산으로 잠입해 들어가 일본 상선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영해 일대는 을미의병이 해산한 뒤에도 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 민란의 무리를 화적(火賊) 또는 활빈당(活貧党)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란은 신돌석의 청도·부산에서의 활동과 사회사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배경속에서 신돌석은 을사의병을 평민부대로 재편하여 경북 동북부 일대에서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비밀리에 체결되자 이미 을미 의병 때 거의한 바 있던 이인영(李麟榮)·이강년(李康秊)·이은찬(李殷瓚) 등이 재차 강원도 일대에서 기병하였다. 신돌석은 1906년 3월 13일(음) 아우 우경(友慶)과 함께 영덕(盈德) 복평리(福坪里) 축산(丑山)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대장기를 세우고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 되었다. 가산(家産)을 흩어서 의병을 모으니 그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 신돌석은 먼저 군율을 정하여 군사들의 기강을 엄숙히 한 다음, 이웃 고을인 진보(眞寶)의 이하현(李夏鉉), 영덕의 정용기(鄭鏞基) 그리고 이한구(李韓久) 등의 의진과도 연락하여 유기적인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는 영해읍을 거쳐 평해읍(平海邑), 울진읍(蔚珍邑)을 행군하며 병력을 점차 증강시켜 갔다. 인근 일대에 그의 명성이 크게 떨쳐 그를 따르는 군사가 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또한 영양(英陽)·청송(靑松)·의성(義城)·봉화(奉化)·삼척(三陟)·정선(旌善)·강릉(江陵)·원주(原州) 등 경북·강원도 일대의 의병활동을 자극하여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적병이 그 일대에 집결하였다. 또한 대구·원주·경주 등지의 진위대(鎭衛隊) 주둔 병력도 출동하였다. 이들은 공동작전을 펴 가며 남쪽에서부터 역습을 꾀하고 있었다. 대장 신돌석은 적의 대공세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신속하게 대처하였다. 의병부대를 이끌고 태백산맥의 산악 지대를 이용하여 적의 집중 공격을 피하고, 혹은 해안선을 따라 적을 유격하면서 다시 영해 지방으로 내려왔다.이때 다음과 같은 방문(榜文)을 붙여 수령의 죄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본관(本官)이 애국선정(愛國善政)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3가지의 큰 죄가 있다. 막중한 의병진을 효유한다고 하면서 감히 대의(大義)에 항거하니 그 죄가 하나요, 병정을 청하여 빌었다가 의병진을 치려 하니 그 죄가 둘이요, 왜학(倭學)을 설치하여 사람을 무도한 지경에 빠지게 하려 하니 그 죄가 셋이다. 이러므로 대의 명분에 의하여 토벌을 받을 것이다."

신돌석은 영해 읍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성중에서는 성벽에 총 구멍을 뚫고 힘을 다하여 대전하였지만, 당해 내지 못하고 영덕 지방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신돌석 의진의 이와 같은 기세에 놀란 적은 종래 서울 이북 수비에 전력하던 수비대를 나누어 서울 이남 각 요지에 배치하게 하였으며, 또 대구·경주 진위영(鎭衛營)의 병정들을 영해 지구로 급파시켰다. 그러나 신돌석 의진은 경상북도·강원도의 동해안 지구로 왕래하면서, 기민한 활동으로 적을 궁지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해 11월에는 일월산(日月山)·백암산(白岩山)·대둔산(大遯山)·동대산(東大山) 사이로 군사들을 옮기고 요해지를 의지하여 자유 자재로 유격전을 전개하니, 대부대의 정규군으로 구성된 적군은 이들의 뒤를 추격하느라 많은 병력을 낭비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영동·영서(嶺西)에 주둔하던 일군들은 '신돌석 의병 부대'라는 말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접근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1907년 봄에 중군장인 백남수(白南壽)와 김치헌(金致憲) 등 용감한 휘하 장령들과 함께 영덕 일대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협력을 얻어 가면서 진용을 보강하고, 친일파들을 처단하여 의진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높아 갔다. 이때 신돌석 의진은 울진 매화리(梅花里)로부터 영해 수동(壽洞)으로 돌아와 다시 많은 의병을 소모하여 영덕의 관서를 격파하고 원구(元邱)에 주둔하였다. 다시 사현(笥峴)으로부터 청부역(靑鳧驛)에 이르렀을 때 그의 군사는 3,000여명에 달하였다. 9월 15일 영양(英陽) 주곡(注谷)에서 일군 1종대(縱隊)와 격전을 벌였다. 적병이 물러가자 신돌석 의진은 10여 일간 이곳에 머물면서 흩어진 주민들을 불러들여 구국 항쟁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는 일본의 강압적인 군대 해산 후이었으므로 구한국군들이 신돌석 의진에 합류하여 군세를 크게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돌석은 의진을 이끌고 진보(眞寶)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일찍이 이하현(李夏鉉)이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협력하여 적을 격파하고 청송(靑松)으로 갔다. 이곳 부사인 안종덕(安鍾悳)에게 구국을 위한 항일운동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경주의 동북 대산성(岱山城)에 이르러 일군과 수일간 격전하였다. 이때 왼쪽 엄지손가락에 총탄을 맞았으나,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적과 대전하였다. 그후 청하(淸河)로 돌아갔다가 다시 영덕 새며루(鳥硯)에 이르러 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대동(大洞)에서 소를 잡아 향응을 베풀어 군졸들을 위로하였다.

10월 영해로 들어가 경무서를 격파하고 일경을 추방한 후 수동(壽洞)으로 들어가 군량을 모으고 군졸들을 휴식시켰다. 이때 이인영(李麟榮)의 의진을 중심으로 연합 의진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으며,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양주(楊州)에서 합진하자는 이인영의 격문이 신돌석에게 전달되었다. 신돌석은 대오를 정비하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양주로 향하였다. 허위(許蔿), 민긍호(閔肯鎬), 권중희(權重熙), 방인관(方仁寬), 정봉준(鄭鳳俊), 이강년(李康秊), 문태수(文泰洙) 등의 의진이 호응하여 왔다. 이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신돌석은 교남의병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돌석은 비록 의병장으로서 용맹을 떨치기는 하였지만, 신분이 미천하여 양반 유생출신의 다른 의병장과 나란히 앉을 수 없었다. 당시 의병장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전개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반 봉건운동 계열의 천민출신 신돌석은 박정빈(朴正斌)이 그대신으로 대치되었다. 그뿐 아니라 백제·홍범도·김수민 등 각처에서 용맹을 드날리던 천민 의병장들도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11월에 있었던 서울 공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08년 정월 신돌석은 의진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평해(平海)로 들어가 독곡(獨谷)의 일군을 섬멸시키고 2월에 영양읍에 주둔하였다. 이즈음 적의 대군이 투입되었다. 신돌석은 그것에 대비하여 수비(首比)·흥안(興安)·울진(蔚珍)·강릉 일대의 의병부대를 합진하여 대장이 되었다. 안동 춘양면(春陽面)을 거쳐 삼척 소봉동(小鳳洞)에서 일군을 섬멸하고 무기·군수품을 탈취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7월에 의병활동을 재개하여 평해 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영해 희암(喜巖)에서 적과 격전을 벌였다. 10월에 의진을 거느리고 안동 재산면(才山面)을 거쳐 영양 금정여점(금丁旅店)에 이르렀을 때 일군과 맞부딪쳤으나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11월에 엄동을 맞이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게 되자, 다음해 봄에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일단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신돌석의 활약상에 대하여 1908년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 "···혹은 독립하고 혹은 다른 집단과 영합하여 영양·영덕 지방을 근거로 하여 본도 북부는 거의 횡행하지 아니 한 곳이 없다. 그는 경찰대·수비대·헌병대에 의하여 토벌 당한 일이 수십 차례였으나 실로 출몰이 자재(自在)하여 용이히 체포되지 않고 지금도 오히려 영양 지방에 출몰하여···" 일제는 무력으로 신돌석을 제압시킬 수 없음을 알고 회유책을 쓰기로 하였다. 그에게 끊임없이 도장관(道長官)의 맹서니, 통감의 편지 같은 것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일제는 다시 그의 아내를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고 권유서를 주어 돌려보냈다. 그는 아내를 크게 꾸짖고 권유서를 불태웠다.

의병을 해산한 후, 가족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영덕 눌곡(訥谷)에 이르렀을 때 길에서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金相列)을 만났다. 김상렬의 간청으로 그의 집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날 밤 김상렬 형제의 음모에 빠져 독주(毒酒)를 마셨다. 신돌석이 쓰러지자 김상렬의 3형제가 합세하여 도끼로 쳤다. 1908년 12월 12일의 일이었다. 이러한 참담한 소식을 전해들은 지방민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청하에 살던 한 사기장수가 지고 가던 짐을 내던지며, "세상사가 다 됐네. 우리가 이렇게 구차하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신 장군이 왜놈을 쓸어 내고 우리를 구해 낼 줄 믿었더니 이제는 다 틀렸네." 하고 통곡하였다고 전한다. 그후 부친 석주와 아우 태범(泰範)이 신돌석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활약하다가 태범은 오히려 연루자가 되어 수개월 투옥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호서의병장 이강년이 그의 용감성을 칭송하면서 "참으로 장사(壯士)다. 나는 그렇지 못하니 물러가고 당신을 추대하여 양도 도의장(兩道都義將)으로 삼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연합 의진에서 소외시킨 것은 한말 의병운동의 한계성이었고, 그 때문에 구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민족에게 망국의 한을 남겨 주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1권 338·339·340면
  •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68·72면
  • 고등경찰요사 6·7·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91·505·506·507·574·5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13·389·390·391·411·412·413·414·417·416·679·574면
  • 황성신문 광무10년 6. 21, 6. 30, 7. 1, 12. 8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권 55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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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신돌석 본명 : 태호(泰鎬), 자 : 순경(舜卿), 아명 : 돌선(乭先) 경북 영덕 1906년 영양 관아·울진읍·삼척 장호리·영해 읍성·영덕읍성 공격, 1907년 일월산·백암산 일대 유격전, 신돌석 생포작전.
본문
1878년 11월 3일(음력)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도곡동(陶谷洞) 복평마을(일명 ‘복더미’ 마을) 528-1번지에서 아버지 신석주(申錫柱, 족보에는 신석주(申淅柱))와 어머니 분성(盆城) 김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셋째이자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본래 이름은 태호(泰鎬), 자는 순경(舜卿)이다. 어릴 때 돌선(乭先)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불리다가 돌석이라는 이름이 굳어졌다고 알려진다. 평민 신분이었지만 아버지의 노력으로 이웃의 반촌(班村)인 상원(上元)마을의 진성이씨 문중의 사랑채인 육이당(六怡堂)에서 이중립(李中立)에게 글을 배웠다. 한시 두 편이 전해지는 것도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96년 초 만 18세 되던 해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여파로 고향에서도영해의진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으로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1902~1903년 무렵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축산리(丑山里) 출신의 동갑내기인 청주 한씨 한재여(韓在汝)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 집안에 있지 않고 여러 곳을 떠돌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 일화를 남겼고, 경북 동북부 지역 태백산맥 일대에서 활빈당(活貧黨)으로 활약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 울진군(蔚珍郡) 평해(平海)의 바닷가 명승지인 월송정(月松亭)에 올라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감회를 남긴 우국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처럼 나라를 걱정하던 그는 1906년 4월 6일(3월 13일, 음력) 복더미마을 앞 주점에서 200~300명 병사를 집결시키고 영릉의병(寧陵義兵)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웃 상원마을 앞의 개천가 숲에서 훈련을 시작하였고, 가까운 고래산 중턱에서 군사훈련을 펼치면서 점차 조직을 갖추어 참모장이나 선봉장 · 중군장 · 포대장 · 소모장 등을 두었다. 영릉의진에는 의병장인 그가 평민 출신임에도 주요 간부진에 양반이나 중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참봉이라 불린 한영육(韓永育)이나 군에서 주사를 지낸 백남수(白南壽)가 그들이다. 거병 직후 첫 번째 작전은 병력과 무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영해부(寧海府)의 속현(屬縣)이던 영양과 진보에서 인력과 무기 · 식량을 확보하였다. 소모관이 된 영양 출신 이창영(李昌英), 그와 함께 사형판결을 받게 되는 영양 출신 조준용(趙俊容), 진보 출신 배선한(裵善翰), 윤학이(尹學伊), 진보 출신 보따리상인 신낙선(申洛先) 등이 봉기 직후에 영양과 진보에서 모집된 대표적 인물이다. 의진 규모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의병을 일으킨 1906년부터 1907년, 곧 전반기에는 수십 명에서 300~400여 명에 이르렀다. 먼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관아의 무기고를 공격하거나 민중이 소유한 무기를 수집하였다. 1906년 4월 30일 영양군 관아를 공격해 들어간 것이 첫 사례였다. 또 읍민들로부터 조총 35자루를 확보하였다. 7월 초에는 영덕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비롯한 물자를 확보하였다. 또 전투를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화약과 탄알을 만드는 납이 필요하였다. 우선 무기고를 털어 이를 공급하였지만, 해안지방으로 나가 그물추를 가져다가 납 탄알을 만들고, 포수들에게서 화약을 공급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활동하는 동안에는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경북 진보에서 소를 구입하여 병사들을 먹이거나 식육점에서 소 한 마리를 구입하여 군사를 배불리 먹였다던가, 또 당목 6필을 사서 옷을 지어 포군에게 입혔을 때 부호 집에서 모금한 돈을 사용하고, 신분이 낮은 인물에게서는 정당하게 구입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영덕군 영해면 원구마을이나 영양군 주실마을 등에서는 양반들이 재원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신돌석 의진은 영양과 청송에서 자원을 확보한 뒤에 울진과 삼척을 공격하는 것이 기본 작전이었다. 영릉의진이 갖추어지자마자 첫 공격 대상으로 울진을 정한 뒤, 이 전략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처럼 울진이 공략대상이 된 이유는 그곳에 일본의 전초기지가 마련된 데다 1890년대부터 일본 어부와 수산업자들이 잠수기 어선을 동원하여 전복과 해삼 등 자원을 쓸어가는 행위로 인해 손해를 보게 된 일반 양민의 원성이 높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1906년 4월 25일 신돌석의진의 첫 북상이 추진되었지만, 원주진위대에 의해 밀려났다. 그해 5월 초 2차 북상길에 나서 8일 울진에 이르렀다. 일본인을 사살하고, 일본인 집을 집중적으로 부수었으며, 1,500~1,600냥을 빼앗았다. 삼척의진과 연합한 신돌석의진은 공동전선을 이루며 전투를 펼쳤다. 이어서 삼척 바로 아래에 있는 일본인 전초기지인 장호관을 공격하였다. 6월 상순에 전개된 3차 진공에서 울진관아 공격에 이어 장호관전투를 치렀다. 『황성신문』은 보도를 통해 당시 울진을 공격한 의병 규모가 300명이 넘고, 관아가 의병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무기고를 열어 상당수의 무기를 장악했다는 점을 알렸다. 4차 울진 공략은 1907년 1월 초에 펼쳐졌다. 울진읍내를 공격하고 장호동에 대한 2차 공략을 감행하여 군수 윤우영을 포박하고, 의병 300~400명이 울진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우편물을 탈취하고 소각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우편국취급소를 공격하여 소장 이하 4명이 부상을 입고 해안으로 피신하여 상선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후송하였고, 의병들은 귀중품을 갖고서 산으로 올라간 뒤 만세삼창을 하고 흩어졌다고 한다. 1907년 여름인 8월 제5차 울진 진공에 나섰다. 잠시 주실마을에 머물던 영릉의진은 울진을 향해 북상길에 올랐다. 삼척 장호관에 대한 세 번째 공략이었다. 9월 7일 신돌석은 의진을 이끌고 강원 삼척군 원덕면 장호동(현 삼척시 근덕면 장호)에 도착하여 전복을 잡고 있던 일본인을 습격하여 사살하고 물자를 빼앗았다. 영릉의진은 태백산맥 속 곳곳에 요새를 두었다. 병사들을 쉬게 하기도 하고, 훈련장으로 사용하기도 하려면,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미리 탐지하면서 피하기도 좋은 요새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초기인 1906년에도 영덕에서 가까운 산 속인 묘곡면 대동 골짜기를 요새로 이용하였다. 1906년 후반기에는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의 수동(水洞, 물골) 희암곡(喜庵谷)이 주로 요새로 이용되었다. 희암곡은 그 입구가 암벽으로 막힌 좁고 꼬불꼬불한 골짜기로 그 속이 물병 속 같아 입구만 틀어막으면 적의 침공을 웬만큼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의병이 비교적 장기간 주둔할 수 있고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곳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을 요새로 삼는 전략을 세웠다. 1907년 겨울 경기도 양주에서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정되었으나 참가하지 않았다. 1907년 11월 이강년의진과 연합하여 순흥을 공략한 기록이 있으나, 이는 별동대의 활동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겨울 이후 새로운 요새와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울진군 평해 부곡온천이 있는 온정곡과 그 이웃 선미동이 전초기지였고, 그곳에서 백두대간의 척추 속 검마산 바로 아래 독곡(獨谷, 독실)이 요새였다. 영릉의진이 마지막을 장식할 때까지 이용하던 최후의 요새는 바로 이곳, 독곡이었다. 독곡은 백암산(1,003m)과 검마산(1,017m) 최정상 봉우리가 맞붙어 서 있는 사이로 마치 절벽처럼 내리 꽂힌 깊은 골짜기이므로 ‘항아리’ 같이 생긴 골짜기의 생김새에서 독곡 혹은 독실이라 하였다. 의병은 토벌대에게 쫓기거나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는 사실 밥 한 끼 제대로 먹기 힘들고, 잠 한 번 마음껏 잘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점에서 이 요새지는 의병에게 상당히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1907년 말 이후부터 신돌석의진의 투쟁 양상은 많이 바뀌었다. 우선 일본군이 적극 공세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일본군의 이른바 ‘토벌작전’을 맞받아치는 반격작전을 펼쳤다.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마주치게 되는 시기는 제5차 울진 공격 직후 평해를 거쳐 백암온천 근처 선미동을 지나 태백산맥을 파고들던 1907년 9월이었다. 평해에 도착한 이틀 뒤인 1907년 9월 15일 영릉의진은 영양 동북방 20리 지점에서 일본군 토벌대 제1종대(縱隊)와 부딪쳐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군을 따돌리고 북상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1월까지 혹한기에 접어들자 일본군은 제2차 토벌작전을 펼쳤다. 11월이 되자 일본군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은 대구지역에 주둔한 보병 제14연대 제1대대장 아카시(赤司) 소좌에게 3개 중대에 기관총 2정까지 지원해 주면서 재차 의병을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12월 8일에는 삼척 주둔 제49분대 제1중대로부터 니시무라(西村) 중위가 41명을 인솔하고 울진 수비를 위해 출발해왔고, 울진분서 순사부장 스즈키(鈴木鶴次郞)는 이와 동시에 순사 4명과 함께 삼척에서 우편선을 타고 울진에 도착하는 등 일본군대와 경찰까지 동원되었다. 신돌석의진은 이와 같은 일본군대와 경찰 연합 토벌대의 공격에 맞서 혹한기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 앞서 그는 대부대를 소규모의 여러 부대로 나누어 산발적인 기습전을 펼쳐나가기로 전략을 짰다. 그러나 1908년 1월 10일 무렵 신돌석의진이 자랑하던 백암산과 검마산 사이의 독곡 요새가 일본군에게 알려지면서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일단 위기를 넘긴 그는 영양군과 울진군 사이를 넘나들며 20명에서 50명 정도 소규모로 구성된 여러 부대를 이끌면서 집중적인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사라졌다. 1908년 2월 일본군이 제2차 공격에 나서자 그는 치고 빠지는 반토벌작전으로 대항했다. 제1구사령관 야마다(山田) 소좌가 봉화군을 거쳐 예안으로 출동하였고, 일본군의 ‘의병토벌대’는 모두 6개 중대로 편성된 채 일월산 지역을 동서와 남북으로 나누어 그물을 치듯 공격해 왔다. 그러나 그는 이를 따돌리고 포위망을 빠져 나갔다. 이를 추적하던 니나가와 소위는 의병들을 놓쳐버린 이유에 대해 “준험한 비탈에 절벽일 뿐 아니라 한 척 이상의 적설(積雪)로 움직임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추격의 효과가 극히 적었다”라고 보고하였다. 눈 위에 발자국이 남는 한겨울 산악전투에서 발자취조차 찾지 못할 만큼 그와 의병들은 날래게 빠져나가며 일본군의 추격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일본군이 2월 이후에 벌인 세 번째 ‘토벌작전’은 ‘신돌석 생포 작전’이라고 불리었는데, 그는 이 작전마저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1908년 3월 일본군은 신돌석 아내 한재여를 찾아내 안동으로 연행한 후 후하게 대접한 뒤 회유하는 글을 주어 남편에게 전달하게 만드는 등 회유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그는 가족이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도록 칠보산 서쪽 기슭에 숨겨 두었다. 1908년 4월 들어서 그는 주로 평해 · 진보 · 영해 등 자신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다시 전투에 나서기 위한 준비작업에 몰두하였다. 4월에 280명이나 되는 의병을 이끌고 주요 거점의 하나인 희암곡으로 들어갔고, 주변에서 의병을 모으면서 군자금도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 병력을 바탕으로 5월 30일에 제6차 울진 공략을 추진하여 상죽전(上竹田)으로 북상해 갔다. 이에 5월 30일부터 울진에서 일본경찰과 정면으로 부딪친 그는 불영계곡을 거쳐 일월산 동쪽 산자락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치고 빠지는 작전을 순식간에 벌였다. 그러나 반토벌전을 벌이면서 의진의 규모는 점차 작아졌다. 그 결과, 전반기에는 200~400명 정도의 대규모 부대로 움직였지만, 후반기에 들어 산악전투를 치르면서 부대의 규모가 줄어들었고, 작은 규모의 부대로 쪼개지면서 작전 반경도 좁아졌다. 일본군과 경찰의 집요한 추적과 ‘토벌작전’을 따돌려야 하는 부담 때문에 활동지역은 일원산을 비롯한 태백산맥 오지로 바뀌었다. 이때 무기는 주로 화승총이 쓰였다. 그러면서도 소수의 양총(洋銃)도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일본군과의 전투 속에서 확보한 것이었다. 1907년 말 당시에 소유한 무기가 “91자루의 화승총”, 혹은 “양총 5~6정과 화승총 250~260정”이라고 한 기록에서 무기가 비교적 넉넉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납을 이용하여 탄환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자 전반기처럼 후반기에도 납으로 만들어진 그물추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해안지역을 왕래하였다. 1908년 5월 30일부터 사흘 동안 울진공략을 벌인 후 그는 7월에 들어서는 북으로 울진 남면에서 남쪽으로 영양 석보와 진보 사이까지 넓은 활동 범위를 보인다. 그러다가 8월 중순에 들면서 의진이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이 5월부터 민간인처럼 꾸며 투입한 ‘변장부대’가 그의 부대에 타격을 입히기 시작하였고, 일본군 수비대가 계속 늘어난 결과였다. 특히 『귀순법』이 발표되면서 대열을 이탈하는 의병들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활동도 자연 위축되었고, 대규모 전투도 잦아들었다. 신돌석의진은 1907년 말부터 투항자가 생겨난 이래로 1908년에 들면서 투항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1908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투항한 신돌석의 부하들은 약 한 달 열흘 남짓한 기간에 무려 53명이나 투항하였다. 10월 25일에는 의진의 핵심인물인 이오촌과 교련장(敎鍊將)으로 알려진 이화진이 투항하였다. 이에 갈 길을 고민하던 그는 만주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1908년 12월 들어 만주행을 결심한 그는 마지막 준비 작업에 몰두하였다. 12월 11일 밤 9시경 영덕군 북면 눌곡(현 영덕군 지품면 눌곡)에 도착하였다. 외가 집안 6촌인 김상렬(金相烈) 형제의 집에 네 시간 동안 머물렀다. 이후 집을 나오던 길에 그는 김상렬 형제에 의해 살해되었다. 일본군은 살해범을 김도룡(金道龍 · 金道用) 형제라고 기록하였는데, 김상렬 형제로 판단된다. 순국 시각은 1908년 12월 12일 새벽 1시 무렵이다. 순국을 둘러싸고 일본 경찰과 민중의 시각은 큰 차이를 보였다. 일본경찰은 사건 발생 원인을 의병에 대한 의견충돌에서 빚어진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에 반해 민중은 현상금에 눈이 먼 인척들의 잘못된 욕심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의 순국을 너무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최후 모습을 장렬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일월산과 백암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고 평가한 대목은 그의 활약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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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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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생가 신돌석장군 생가 경상북도 영덕군
2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 서울특별시 중랑구
3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4 장소 의병대장 신돌석장군 유적지 경상북도 영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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