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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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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10269
성명
한자 池靑天
이명 李靑天, 池大亨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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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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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광복군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19년 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2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일본육군중위가 되었다가 대한독립에 뜻을 두어 1916년 만주(滿洲)에 가서 양로군정서(兩路軍政署) 부속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성대장(敎成隊長)으로 있었음
2. 1920년 일본의 양협(兩狹)작전에서 반항하여 이를 격퇴하고 동년 12월 김좌진(金佐鎭) 장군과 합류하여 영안현(寧安縣)에서 서일(徐一)을 총대로 하는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활약함
3. 익년 정월 독립군의 부사령관이 되어 강양(崗陽)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물리쳐 점령하고 소령(蘇領)으로 건너감
4. 소령에서 고려군관학교(高麗軍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 중 사상적 대립으로 (蘇)당국은 동년 6월 22일 독립군의 무조건 무장해제를 강요함에 6월 28일 장군은 민족적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항전 끝에 피체되었다가 석방됨
5. 1925년 1월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장 및 조선의용군총사령관을 겸임하여 평안도(平安道) 일대의 일병을 소탕함
6. 1930년 홍진(洪陳), 신숙(申肅) 등과 한독당(韓獨黨)을 조직하여 군사위원장(軍事委員長)에 취임하고 동년 11월 독립군총사령관이 됨
7. 1932년 2월 18일부터 일본의 육공공격을 견디어 다음해 6월에는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대첩(大捷)하여 다수의 전리품을 획득하였음
8. 하남 낙양(河南洛陽) 군관학교 특설반의 책임장교로서 동포의 군사교육에 힘씀
9. 1941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9월 17일에 장개석(蔣介石) 총통(總統)의 협력을 얻어 광복군총사령관에 추대되어 해방되기까지 활동
10. 1957년 1월 노환으로 서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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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종로(鍾路) 사람이다. 1906년에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1908년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大韓帝國陸軍武官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0년에는 일본 동경(東京)의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를 졸업하였고 1912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일본 육군에 임관되어 복무하던 중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 중위로 승진되어 청도(靑島)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결심하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만주로 건너간 뒤,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관에 임명되어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많은 독립군 간부를 양성, 배출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장(敎成隊長)을 역임하였다. 1920년말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중·소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에 모인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게 되었으며 그는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이 대부대를 이끌고 소련령인 "이만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일르크츠크시에 주둔한 독립군은 다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소련정부의 협조를 받아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를 설립하였으며, 그는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간부급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의 이용가치가 줄어들자 소련정부는 약속을 위반하고 고려혁명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자 이에 항전하다가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자유시참변"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석방되어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고려혁명군 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하였으나 소위 창조론과 개조론 등으로 통일된 의견의 수합이 어려워지자 1924년에 신 숙, 김규식 등과 함께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를 구성하고 그는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 만주로 귀환한 그는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의성단(義成團), 광정단(匡正團), 통의부(統義府) 등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고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길림성(吉林省) 화전현(樺甸縣)에 본부를 두고 국내에까지 대원을 파견하여 일제의 각종 기관을 파괴하고 일관헌(日官憲)을 주살하였으며 무기를 노획하는 등 활발히 활약하는 한편으로 이념(理念)에 입각한 독립운동의 체계화를 위하여 고려혁명당을 창당하고 그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 2월에는 정의부, 참의부, 국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혁신의회(革新議會)의 군사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부 통합운동이 단체본위와 개인본위 통합론으로 분리되어 실패하게 되자 그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全民族唯一黨組織協議會)에 참가하였다. 1930년 김좌진이 암살 당하자 동년 7월 그는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하였으며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1932년에는 중동철도 연선과 동빈현 등에서 적의 대부대와 조우전이 있었으며, 아성현(阿城縣)전투, 쌍성현(雙城縣)전투, 대전자(大甸子) 전투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를 완전히 석권하게 되자 만주에서의 무장항일투쟁이 어렵게 되었으며, 1933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수십 년간 항전하던 만주를 뒤로하고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본토로 들어갔다. 1933년 10월 그는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하남성(河南省)에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을 창설하고 총책임자로 취임하여 교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 교관에 오광선(吳光善), 조경한(趙擎韓) 등을 임명하고 상해(上海), 남경(南京), 천진(天津), 만주(滿洲) 등지에서 애국청년 90여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1934년에는 남경(南京)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으며, 다음해에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군사국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장사(長沙)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의 군사학 편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조성환(曺成煥)을 주임위원으로 유동열(柳東說)·현익철(玄益哲)·이복원(李復源)·김학규(金學奎) 등 위원과 같이 군사학을 정리, 편수하였다. 또한, 1939년 10월 사천성(四川省) 기강( 江)에서 열린 의정원(議政院) 정기의회에서 의정원의원 및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에 국무회의에서 군무장(軍務長)으로 선임되어 입법·행정·군사에 대한 제반사항을 처리하는 중책을 맡았다. 이때 광복군 창설을 목표로 조성환(曺成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특파단을 조직하여 서안(西安)으로 파견하여 활동케 하였으며 다음해 2월에는 군무부에서 종래 경영하던 군사학 편수사업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하여 군사학 편수위원회 주임위원으로 취임하여 이복원(李復源)·조경한(趙擎韓)·김학규(金學奎)·조인제(趙仁濟)·공진원(公震遠)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고 이들을 지휘, 독려하여 군사학을 편수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국민정부와 협정을 체결하고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成立典禮式)을 중경(重慶)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거행하였는데 이때 그는 총사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참모장 이범석(李範奭), 부관장에 황학수(黃學秀) 등이 임명되었다. 동년 11월에는 이범석과 같이 중국 당국과의 협정문제를 해결키로 하고 총사령부를 서안(西安)으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총사령관대리에 황학수, 참모처장대리에 김학규 등을 임명하고 간부 200여명과 함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가서 구체공작을 준비하고 진행케 하였다. 1941년에는 지대(支隊)를 편성하고 각지에 파견하여 사병모집 및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 적정 정찰, 유격전 전개 등의 임무를 수행케 하였는데 제1지대장 이준식(李俊植)은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에서, 제2지대장 공진원(公震遠)은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서,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는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서,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은 서안(西安)에서 각각 활동케 하여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한 중국 중앙군 및 주중연합군(駐中聯合軍)과 긴밀한 연락 및 협조를 취하여 항일전을 전개하고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43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03·758·830·896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457·51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51·242·261·279·474·514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04·308·309·313·316·500·512·516·821·840·856·867·869·870·873·883·898·899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41·243·244·245·249·251·258·259·261·266·268·270·279·280·281·304·306·307·308·312·399·408·409·422·425·460·520·524·531·535·546·547·587·588·596·602·633·634·636·689·723·772·77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80·293·294·410·413·417·422·485·498·499·571·572·578·579·599·623·624·626·627·642·667·680·681·688·692·696·697·6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45·47·48·49·70·112·119·120·127·143·146·147·148·149·160·161·170·172·186·192·194·195·200·205·216·272·273·297·307·310·311·324·327·330·344·458·471·487·530·544·559·568·571·572·583·586·596·607·625·626·630·635·636·639·643·666·677·687·688·73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62·77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368면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215면
  • 조선통치사료(한국사료연구소) 470·477·495·496·497·498·499·503·504·505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37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2·426면
  • 고등경찰요사 117·118·119·125·126·127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55·256·269·271·274·275·276·279·286·320·321·347·348·349·356·357·358·361·366·369·370·371·372·377·378·391·392·394·422·427·442·477·4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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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63·86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0·30·35·84·254·334면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66·76·77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5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9면
  • 기려수필 425·426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52·53·55·99·100·101·102·104·105·135·139·151·156·157·172·195·196·201·20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383·508·519·5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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