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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36
성명
한자 曺成煥
이명 曺煜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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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4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12년 일본총리 계태랑(桂太郞)만주행(滿洲行) 기회를 이용하여 자살하려다 발각되어 거제도(巨濟島)에 1년간 유형(流刑) 당하였음
2. 1919년 도만(渡滿)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사부장(軍事部長), 대한독립군 외교부장(大韓獨立軍外交部長), 신민회 외교위원장(新民會外交委員長) 등의 직책으로 활약하였고 곧 상해(上海)로 가서 임정 국무위원(臨政國務委員)최고통수부(最高統帥部) 판공처장(辦公處長)으로 8년간 활약하였음
3. 1940년에 서안(西安)에 가서 광복군 설립의 기초를 닦음
4. 8.15 광복 후 귀국하여 1948년 10월에 (病)으로 낙산장(駱山莊)에서 작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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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서울 낙원동(樂園洞) 사람이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전덕기(全德基), 이승훈(李昇薰), 안태국(安泰國), 노백린(盧佰麟)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일단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간도(間島), 노령(露領) 등지를 편력하면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1912년 그는 만주를 시찰하러 온 일본 총리대신(總理大臣) 계태랑(桂太郞)의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거제도(巨濟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가 재차 상해로 건너갔다.

1916년 9월 그는 신규식(申圭植), 민충식(閔忠植), 박은식(朴殷植) 등과 체화동락회(棣華同樂會)를 조직하여 교민의 단결 및 재외한인단체와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에 종사하였으며,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열을 올렸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吉林)에서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을 발표하여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공표하였는데, 그는 39명의 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그는 노령(露領) 니콜리스크에서 유동열(柳東說) 등과 무력투쟁을 계획하다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하게 되자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김동삼(金東三), 조영진(趙英鎭), 조소앙(趙素昻) 등 30여 명과 함께 1919년 3월 하순 노령에서 상해로 와서 임정에 참여하였다. 동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에서 개최된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노령을 대표하는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겸하여 군무차장에 임명되었다. 4월 23일에는 차장제를 위원제로 바꿈에 따라 군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날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그는 박은식 현상건 신채호 등과 함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만주로 나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그는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등 독립군의 무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으며, 동년 10월 청산리독립전쟁에 대승한 북로군정서 및 대한독립군, 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10개 독립운동단체들이 1920년 말 밀산(密山)에 모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추대하게 되자 그는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노령으로 들어갔다. 노령 이만에서 이청천,(李靑天), 최진동(崔振東), 오하묵(吳夏默), 홍범도, 안무(安武),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그는 고려의용대를 조직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백계(白系)러시아군 토벌작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공산당의 배반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당하는 커다란 손실을 입고 그는 북경(北京)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외무위원으로 중국정부와의 외교 교섭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을 계속하다가 북만의 동지들을 돕기 위하여 다시 만주로 복귀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영안현(寧安縣)에서 김혁(金赫), 김좌진(金佐鎭), 나중소(羅仲昭) 등과 신민부(新民府)를 새로 조직하고 외교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당시 신민부의 군세는 보안대, 별동대를 합하여 530여명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군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穆陵縣 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년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이범윤(李範允)과 같이 고문에 추대되어 교육 훈련을 지도하였다.

1925년 10월 임시정부가 좀더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탁(李沰),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 이유필(李裕弼),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그를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만주에 머물러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취임하지 않았으며, 1926년 2월 18일 국무원에서 전원 해직되었다.

1926년 그는 북경으로 가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촉성보(促成報)를 발행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과 단합을 호소하였다. 이를 위해서 만주와 상해에 조두진(趙斗珍), 장건상(張建相) 등을 파견하여 선전에 주력하였으며, 1927년 11월 14일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어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그는 북경대표로 참석하여 이후 한국독립당 발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12월 24일 제23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윤기섭(尹琦燮),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등과 경기도 의원에 다시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국무위원에 선임된 이후 광복시까지 군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 계속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9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황학수(黃學秀), 이준식(李俊植), 왕중량(王仲良) 등과 화북(華北)지구에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여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40년 5월에는 중경(重慶)에서 3당(朝鮮革命黨, 韓國國民黨, 韓國獨立黨)통합운동을 벌여 민족진영의 정당을 연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설하고 그 중앙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운영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여 임정요인들과 같이 환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 유도회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서거하여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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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4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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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809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41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2·3·5·6·7·8·9·11·117·150·156·188·203·206·210·21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6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6·24·25·32·79·99·102·107·10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7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20·22·31·34·35·40·41·165·456·459·462·465·501·508·530·532·547·560·561·595·600·643·664·667·689·698·704·737·743·801·977·978·1052·1053·1054·1055·1056·1063·1078·108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1·109·139·204·329·553·620·621·622·626·630·642·653·654·658·659·663·668·669·679·681·695·701·709·713·718·719·720·753·755·791·804·805·820·821·884·890·907·941·964·966·968·980·984·986·1009·1021·1026·105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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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성환 이명 : 조욱(曺煜·曺旭), 호 : 청사(晴蓑) 경기 여주(驪州) 신해혁명
본문
1875년 7월 9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대신면(大神面) 보통리(甫通里)에서 조병희(曺秉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청사(晴蓑)이며 이명은 조욱(曺煜 · 曺旭)이다. 대대로 관직을 지낸 창녕 조씨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출신으로 부친도 진사였다 1900년 1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육군무관학교는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외국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최고학부였다. 입학생도 칙임관(勅任官)들의 자제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신규식(申圭植) · 서상팔(徐相八) 등의 동기생과 노백린(盧伯麟) · 김희선(金羲善) 등의 교관을 만난 것은 훗날 독립운동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한 만큼 장교로 성장하는 길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1902년 1월, 무관학교 개혁을 요구하는 데 선두에 나섰다. 이 때문에 주동자 13명이 구속되었을 때 가장 강한 역종신형(役終身刑)을 선고받았다가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주동자 가운데 혼자 실형을 살았다. 1904년 6월 칙령으로 13명 모두 복권되고, 보병 참위로 임관되었지만 홀로 보직을 받지 못하고 군대 해산때까지 군적(軍籍)만 유지하였다. 직책도 없던 초급 장교 시절 상동교회를 드나들며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벌이던 인물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외교권을 빼앗긴 정국을 바로 잡아보려고 나서기도 하였다.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 창립에 참가하였다. 신민회는 무너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 자본을 모은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오히려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로 삼았다. 1907년 후반에서 1908년 초반 사이에 교육구국운동과 연해주 의병 연계 작업에 나섰다. 평양 기명학교(箕明學校)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안중근(安重根)이 만주로 갈 때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또 1908년 1월 연해주로 가서 최재형(崔在亨)을 만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논의하였다. 1909년 2월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이는 신민회 주역 안창호 · 양기탁 · 노백린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등과 논의한 끝에 베이징으로 청년들을 보내 군사교육을 시키기로 정한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조욱(曺煜)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7월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열린 신민회 주요 인물 모임에 참석하여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密山) 펑미산(蜂密山)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군사기지를 만들자고 논의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의 교두보로 삼으려던 베이징은 신해혁명의 공격 대상인 청나라의 수도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반북경’ 세력과 연계하는 작업이 필요하였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크게 고무되었다. 마침 무관학교 동기생 신규식이 베이징에 오자 함께 논의한 끝에 난징(南京)으로 향하였다. 1912년 1월 신규식과 상하이(上海)를 거쳐 난징으로 가서 새로운 공화국 중화민국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이때 중국혁명이 성공한다면 한국 독립도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중화민국 건국과 쑨원(孫文)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된 일은 중국만의 행복이 아니라 아시아와 우리나라의 행복이라는 사연을 써서 안창호에게 보냈다. 그리고 신규식과 더불어 자유당과 공화헌정회(共和憲政會)에도 가입하고 중국 혁명의 핵심 인물과도 교류하였다. 이즈음 가장 시급한 과제가 중국 혁명세력과 교류할 기관을 만드는 것이라 판단하여 신규식 등과 함께 1912년 7월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8월 7일 갑자기 일제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끌려왔다. 가쓰라(桂太郞) 전 일본수상의 러시아 방문시 암살을 계획하였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일제는 베이징 일대에서 활약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발을 묶기 위해 22명을 체포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른바 ‘암살모의’ 혐의로 유형(流刑)을 선고받고 1년 동안이나 외딴 섬에서 거주 제한을 당하였다. 유형에서 풀려난 시기는 1913년 말에서 1914년 초였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일제가 패하면 한국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여 1915년 3월 베이징으로 가서 신규식 등과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였다. 독일이 승리하면 중국과 연합하여 일본과 충돌할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독일과 베이징정부처럼 제정(帝政)을 갖추는 것이 삼국동맹, 또는 이에 앞서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을 맺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국내로 황제 위임장을 받으러 사람을 보냈으나, 일제 경찰에 잡히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1917년 7월 신규식 · 박은식 · 박용만 등과 함께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민족대회의 소집을 제안한 것으로 대의정치와 공화정을 구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새롭게 되찾을 나라는 군주국가가 아니라 민(民)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여야 한다는 방향을 설정하였다. 1917년을 지나면서 베이징을 떠나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북만주로 갔다.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우윈현(烏雲縣)에 약 5천 호 가량이 경작할 토지를 얻어 둔전병제를 실시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을 펼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빠른 기간 안에 독립군을 양성하려고 연해주로 이동하였으나, 이동휘(李東輝)의 정치노선과 맞지 않아 이동녕(李東寧)·양기탁 등과 함께 지린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4월 10일에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연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이라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어서 관제를 제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정하자, 군무차장에 뽑혔다. 4월 21일부터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차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자 군무위원장이 되어 군사 업무를 맡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진행 상황이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자 동포들이 터를 잡은 곳에서 독립군을 길러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919년 10월 니콜리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박용만(朴容萬)을 만나 대한국민군을 편성하여 간도와 지린지역의 동지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뜻을 모았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합류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4월 서일(徐一)이 대종교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확대·개편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그해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를 창립하였다. 이와 더불어 중국 현지 당국과도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당시 펑텐(奉天) 독군(督軍) 장쭤린(張作霖)이 일본과 긴밀하게 친일정책을 펼치자 베이징에 머물던 이동녕과 연락하며 외교활동을 벌였다. 특히 펑텐 독군과 반목하던 지린 측으로부터 무기와 토지를 지원받고 군사활동을 안정적으로 펼칠 수 있게 만들었다. 대한군정부는 1919년 12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이름을 바꾸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으로 편제되었다. 1920년 중반까지 김좌진과 함께 왕칭현(汪淸縣) 시다풔(西大坡)에서 대한군정서 병사를 길러내는 데 힘을 쏟았다. 같은 해 7월 총재 서일과 재무부장 계화(桂和) 등과 함께 러시아로 가서 니콜리스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기관총 · 소총 · 탄약 등 무기 구입 계약을 맺었다. 9월 초 무기운반대를 이끌고 소련과 중국 국경을 넘어 시다풔 본영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대한군정서는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 무렵 경신참변(庚申慘變)이 터졌다. 봉오동 · 청산리 승첩 이후 일본군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는 한인사회를 짓밟고 나선 것이다. 대한군정서를 비롯한 많은 독립군 조직들은 동포의 피해를 막고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북간도를 벗어나 12월까지 미산으로 모였다. 대표들은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않고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러시아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출발에 앞서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자 부총재를 맡게 되었다. 병력은 3,500명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이를 이끄는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그를 비롯하여 김좌진 · 홍범도 등 3인이었고, 여단장은 이청천이었다. 독립군 부대와 함께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이르쿠츠크로 가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세워 사관을 기르는 한편 러시아 적군과 손잡고 러시아 백군 토벌에 나서는 등 독립군 간부로서 군관학교 운영과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1년 6월 중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상하이로 이동한 탓에 곧이어 일어난 자유시참변의 참화(慘禍)를 피할 수 있었다. 1921년 여름 상하이를 중심으로 홍콩과 광둥(廣東)을 오르내리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노력하였다. 10월 이후 1년 정도 베이징에 머물면서 자유시참변 당시 만주로 흩어져 되돌아온 독립군을 다시 묶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이세영(李世榮)을 비롯해 박용만 · 이광(李光) · 황학수(黃學秀) 등 군인 출신 인사들과 함께 독립군 조직 통합과 군사 양성 방법을 논의하였다. 북경군사통일회의가 바로 여기에서 형성된 것이다. 한편 192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선임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1922년 가을 이후 북만주와 러시아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10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자 이를 좋은 기회로 파악한 독립군 조직들은 두 지역에서 각각 단체 통일에 나섰다. 이때 북만주로 가서 김좌진 · 김규식과 함께 무장대를 조직하는 한편, 대종교(大倧敎)를 적극 후원하였다. 독립군이 안정적으로 활동하려면 무엇보다 동포사회가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얼빈을 중심으로 자치운동을 벌여 중국 관헌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등 이곳에 둔전제를 확립시켜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를 묶어나가는 작업이 진척을 보이는 가운데, 공산주의 무장단체들이 들어서면서 곳곳에서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좌진 · 현천묵(玄天默)과 함께 군사연합회를 조직하고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려고 나섰다. 남북만주를 오르내리며 노력한 끝에 1923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하지만 9개 단체만 참가하는 데 그쳤다. 1924년 2월 현천묵과 함께 대한군정서를 다시 조직하고 군사부장 겸 참모를 맡았다. 군사 모집과 사관학교 설립에 착수하는 한편 만주 각지에 모연대(募捐隊)를 보내 군자금을 모으는 등 군정서 재건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같은 해 7월 고려혁명군 간부진을 대한군정서로 합류시키기도 하였다. 남만주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가 탄생하자 자리를 옮겨 군사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말 남만주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묶어 정의부(正義府)를 만드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남만주에 정의부가 들어서자 북만주 독립군 단체들도 통합 논의를 거듭한 결과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탄생시켰다. 이에 군정서 대표로서 참가하여 통합 교섭을 이끌었다. 신민부가 조직된 뒤 외교부장이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와 둔전제를 실시하여 상비군을 확보하고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운영하여 독립군의 줄기를 만들어냈다. 1926년 여름부터는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나섰다. 좌우로 나뉜 독립운동 조직을 하나로 묶되, 그것도 하나의 ‘정당’을 만들어 국가를 움직이는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를 구현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1926년 중반부터 안창호가 나서서 벌이기 시작한 이 운동은 그 해 10월 베이징의 좌파 세력과 힘을 합쳐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를 창립시킴에 따라 첫 성과를 올렸다. 여기에 참가하여 10월 12일 열린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원세훈 등과 공동으로 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하고, 창립 후에는 집행위원 겸 대표로서 대당 결성을 위한 활동을 이끌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독립운동계 통합만이 아니라 만주 이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북경촉성회 창립 직후 입적간민회(入籍墾民會)를 조직하여 한인들이 중국 국적을 갖고 안정적 정착을 함으로써 독립군 활동 기반을 다지도록 하였다. 한편 일제가 미쓰야협정(三矢協定)으로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리자 1929년 박찬익과 더불어 외교를 펼친 끝에 이를 해결하였다. 1929년 민족유일당운동에서 좌파가 이탈하자 1930년 1월 임시정부를 에워싼 우파 인물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1년 12월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주로 베이징에 머물면서 한국독립당 북경지부 간사로만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윤봉길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로 옮겨가 있던 1932년 11월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자 이듬해인 1933년 2월 항저우로 합류하여 이동녕 · 조완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강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3월 국무위원을 11인으로 늘리고 여러 독립운동 계열을 입각시켜 항저우 피난 이후 혼란에 빠졌던 임시정부를 수습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국민당 정부의 입장이 호의적으로 돌아서자 김구와 장제스(蔣介石) 간에 회담이 열렸고 한국청년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켜 초급 간부를 양성시키는데 합의하였다. 군사 간부 양성을 위해 청년과 이들을 가르칠 지도자가 필요하자 이청천을 비롯한 만주에서 활동하였던 독립군 주요 인물을 옮겨 오는 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만들면서 다수의 인물이 임시정부를 떠났지만, 김구 · 이동녕 · 이시영 · 조완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고수하였다. 임시정부 고수파는 정부를 지탱해 줄 정당으로 이해 11월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이시영 · 양우조(楊宇朝)와 함께 감사를 맡아 당을 지도하고 감독하였다.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장(軍務長)에 선임되었다. 이때부터 충칭에 이를 때까지 줄곧 국무위원으로서 군사 업무를 총괄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군대 창설 계획을 서둘렀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방략을 의열투쟁에서 군사노선으로 전환하고, 광복의 유일한 방법이 독립전쟁이라는 판단 아래, ‘군사인재 양성’, ‘군사통일기관 설치’, ‘특무사업 실행’을 골자로 하는 사업방향을 정하였다. 이에 유동열 · 이청천과 더불어 군사위원이 되어 실천 방안을 세워 나갔다. 1939년 10월 1일 군무장이자 군사위원회 책임자로서 군사특파단 주임에 선임되었다. 그해 11월에는 군사 자원으로 한인 청년들을 모으기 위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갔다. 이때 황학수 · 왕중량(王仲良) · 이웅(李雄) 등 군사지도자와 서파(徐波)·노복선(盧福善) 등 군사공작원이 동행하였다. 시안에서 한인 청년을 모집하고 지대 조직을 서두르고 있던 1940년 8월 6일 군무장에 다시 선임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임시정부는 ‘당군’이 아니라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한제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했음을 천명하였다. 그해 10월 9일 헌법 개정에 따라 정부 각료 명칭이 변경되자 군무장에서 군무부장이 되었다. 11월 1일에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가지는 대한민국 임시통수부(臨時統帥府)가 시행되면서 당연직으로 통수부 막료(幕僚)도 맡았다. 당시 통수부는 주석에 김구, 막료에 유동열(참모총장) · 조성환(군무부장) · 조완구(내무부장) 등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1940년 11월 말 광복군이 성립한 지 두 달 만에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전진 배치되었다. 이는 전방으로 나아가 군대를 적극적으로 확충하자는 것이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군사특파단과 모병된 인원을 중심으로 제1 · 2 · 3지대를 편성하였다. 1941년 1월에는 시안에서 먼저 활약하고 있던 아나키스트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설득하여 제5지대로 합류시켜 모두 4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12월 29일 임무를 매듭짓자 군사특파단을 해체하고 뒷일을 총사령부에게 넘겨준 뒤, 군무부장과 통수부 막료라는 직책을 맡기 위해 다시 충칭으로 돌아왔다. 1941년 11월 중국국민당 정부가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行動準繩)」을 내놓고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비롯하여 인사권까지 중국국민당 정부에 예속시켰다. 이에 군무부장으로서 이 문제가 광복군만이 아니라 독립운동 전체를 고사시키고 있다고 판단하고 9개 준승 수정을 거듭 요구하였다. 1943년 1월 국무회의에서 유동열 · 조소앙 · 박찬익 등과 소조회(小組會)를 만들어 중국과 재교섭에 나섰다. 그 결과 1944년 9월에서야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통수권을 되찾아오게 되었다. 1944년 5월 군무부장 자리를 내놓고 무임소 국무위원이 되었다. 1935년 이후 지청천에게 넘긴 10개월을 제외하면 오로지 군정 업무만 9년 정도 도맡았다. 1944년 10월에는 통수부 판공처(辦公處)가 신설되면서 주임을 맡았다. 광복이 되자,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이후 대한민국군사후원회 총재, 간도협회(間島協會) 고문,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또 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은 삶을 오로지 나라를 반듯하게 만드는 데 쏟아 부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 지난 1948년 10월 7일 마지막으로 머물던 종로6가 낙산장(駱山莊)에서 만 73세의 나이로 서거하여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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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묘역 효창공원 서울특별시 용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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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당 의열사 서울특별시 용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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