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1919년 2월에 3·1운동의 기독교측대표 이승훈(李昇薰) 및 함태영(咸台永)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경기도 및 충청도지구 연락책임자로 지명되어 3·1운동의 사전 조직에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체포된 33인 중 기독교측 유족의 보호에 노력하다가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가하고, 1919년 11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조사원(調査員)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상해에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가서 교사·전도사·기자 등을 역임하면서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하여 진력하였다.
1921년에 귀국하여 이상재(李商在)·유성준(兪星濬)·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창문사(彰文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출판물에 의한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다가 안성교회(安城敎會) 전도사로 취임하였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안성지회(安城支會)를 설립하고 그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목포 중앙교회(木浦中央敎會)·순천 중앙교회(順天中央敎會)의 교역자로 봉직하면서 일본의 천조대신(天照大神) 부인, 궁성요배(宮城遙拜) 반대, 신사참배(神社參拜) 반대 등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10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42. 9. 30 광주지방법원)
- 조선민족운동년감 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30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08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