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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779
성명
한자 吳寅植
이명 吳丙吉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18 훈격 대통령표창
1918년 10월 전남(全南) 제주도(濟州島) 좌면(左面) 하원리(河源里)에서 김연일(金蓮日) 등과 함께 법정사(法井寺) 항일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벌금(罰金) 30(円)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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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좌면(左面) 하원리(河源里)에서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무장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주지 김연일(金蓮日)을 중심으로 한 법정사의 승려들과 인근의 주민 다수가 참여하여 전개한 일제강점기 제주 최초의 대규모 항일운동이다. 이들은 6개월여 전부터 조직적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화승총이나 곤봉 등 무력항쟁을 준비하였다. 거사 당일 일본인 관리나 상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시키겠다는 목적을 격문으로 알렸다. 강창규(姜昌奎)의 지휘 아래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고 중문(中文)의 경찰관주재소를 불태우며 일본인을 구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오인식은 당일 이종창(李宗昌) 등이 하원리로 들어와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자 양봉(梁鳳) 등과 함께 거사에 참여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66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오인식 역시 이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11월 27일 동지들과 함께 기소되었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 등으로 벌금 30엔을 선고받았다. 이 벌금을 완납(完納)할 수 없을 때는 30일간 노역장(勞役場)에 유치(留置)한다는 결정에 따라, 오인식은 노역장에 유치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대각사상(大覺思想)(대각사상연구원, 2006) 제9권 317면
  • 대각사상(대각사상연구원, 2009) 제12권 356~371면
  •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한금순, 2006) 50면
  • 근대 제주불교사 연구(한금순, 2010) 67, 87~91면
  •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향토문화전자대전)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1919. 2. 4)
  • 수형인명부(受刑人名簿)
  •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
  • 제주항일독립운동사(濟州抗日獨立運動史)(제주도, 1996) 147~149, 365, 424면
  • 순국(殉國)(순국선열유족회, 1994) 11월호 100~10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오인식 오병길(吳丙吉) 제주(齊州)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본문
1896년 9월 9일 제주도 대정군(大靜郡) 좌면(左面) 하원리(河源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군위(軍威)이며, 이명으로는 오병길(吳丙吉)을 사용하였다. 대정군 유향소 별감을 지낸 부친 오영화(吳永花)와 모친 강갑생(姜甲生)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술국치 이후 제주도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탄압하는 부당한 현실을 겪으면서 일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다.1918년 9월, 법정사 주지 김연일(金蓮日)이 군중 앞으로 나와 “왜놈이 조선을 병합 후에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 불무황제가 출연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들을 도외로 구축하여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이에 그 자리에 모인 법정사 신도들은 김연일과 함께 대일항쟁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고, 1918년 10월 7일을 거사일로 삼아 비밀리에 이를 준비하였다. 1918년 10월 4일, 법정사 인근 마을에 격문을 보내어 거사가 예정되어 있음을 알리며, 많은 주민들이 대일항쟁에 참여하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거사일인 10월 7일이 되자 서귀포지역 일제 기관을 습격함과 동시에 마을로 들어가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항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당시 하원리 좌면(左面) 도순리(道順里)에 거주하던 이종창(李宗昌) 등이 들어와 법정사 항일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대오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자 이웃 주민 양봉(梁鳳)과 함께 참여하였다.이때 주도자들이 나눠준 곤봉과 화승총을 가지고 군중과 함께 행진하며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과 전신주를 절단하였다. 중문에 도착해서 주재소를 불태우고 주민 13명을 구출하였다. 또 행진 중에 마주친 일본인을 구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쟁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이를 피해 집으로 귀가하였다.하지만 얼마 뒤 동지 65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어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벌금 30원을 받았다. 그러나 벌금 납부를 거부하여 30일간 노역장에 유치되어 복역하였다. 복역 중에 겪은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유치 기간이 끝난 뒤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38년 6월 7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기념탑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2 사당 의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3 애국선열 추모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4 사당 창열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5 기념관 제주항일 기념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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