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그는 통영면사무소(統營面事務所)에서 면서기(面書記)로 근무 중인 1919년 3월 초 3·1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진평헌(陳平軒) 등 마을 청년 17명과 함께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추진하던 중 사전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통영의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유학했던 학생이 3·1운동의 소식을 전하면서 비롯되었다. 면서기로 근무하면서도 평소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깊게 인식하며 항일의식을 길러가고 있던 이학이는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진평헌(陳平軒)·권남선(權南善)·김형기(金炯綺)·양재원(梁在元)·배익조(裵益祚) 등 청년 동지 17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이들은 먼저 3월 9일 송정택의 사랑방에서 모여 만세의거를 협의한데 이어 3월 12일 재차 모임을 갖고 선언서의 기초, 운동의 방법 및 선언서의 배포 등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3월 13일 이학이는 자신이 군무하는 면사무소에 등사판과 함께 이웃 신양면사무소의 등사판까지 동원하여 '동포에게 격(檄)하노라'는 격문을 밤새워 1천 2백매 인쇄하였다. 그리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3월 14일 오전 1시 30분경 그는 강세제(姜世濟)·허장완(許章完) 등과 함께 등사판을 면사무소에 갖다 놓으려 갖다가 대기중인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 때 일제는 일본인 상점에서 인쇄용지를 구입한 것이 단서가 되어 일경의 추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되면서 나머지 동지들도 오전 3시에 전원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가출옥했으나, 1919년 9월에 순국하였다.
이학이의 장례는 5백여 명의 통영지역 학생과 청년, 유력자 및 상인 등이 참가함으로써 사실상 통영지역의 사회장(社會葬) 형식으로 치뤄졌으며, 이 지역 인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90·93면
- 제적등본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54∼257면
- 3·1운동실록(이용락) 662∼664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