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일찍이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즉 일명 전협(全協)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22일 오사카 니시요도가와구(西淀川區)에 위치한 오즈다케바야시(小津武林)라는 방직공장에서 조선인 여공(女工) 36명을 무단 해고한 데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무단 해고 반대와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회사 측이 이를 묵살하자, 같은 해 5월 14일에 다시 시위운동과 공장 내 농성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배창아는 이를 배후에서 지도한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이른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33년 4월 18일 오사카공소원(大阪控訴院)에서 징역 6월(미결구류 100일 통산)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34년 8월 제주도(濟州島) 북제주군(北濟州郡) 애월면(涯月面) 하귀리(下貴里)에서 김홍규(金弘奎)와 함께 야학(夜學)을 설치하고 30여 명의 청소년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제주에서는 일본에서 돌아온 강문일(康文一)·박영순(朴榮淳) 등도 같은 취지로 야학을 설립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에 같은 해 12월 서로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협의회를 개최하고, 함께 표현단체로 교육강연회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학생들에게 이천만가(二千萬歌), 혁명가(革命歌), 단결가(團結歌)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강연회 등을 통해 운동자금을 모은 후에는 생도 연설회나 어린이날 행사 등도 함께 개최하였다.
1935년 5월 5일 어린이날 운동회에 외도리주재소(外都里駐在所)와 제주경찰서(齊州警察署)에서 총동원되어 선생과 학생 1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같은 해 8월 13일에 16명이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으로 송치되었다. 같은 달 23일 김을봉(金乙鳳)과 함께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민중시보(民衆時報)(1935. 8. 1)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5. 8.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