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되자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여 화승총과 사냥총까지 회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洪範圖)는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들에게 항일투쟁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1907년 11월 홍범도를 비롯한 200여 명의 포수들이 북청의 후치령(厚峙嶺)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1월 22일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본군 북청 수비대를 섬멸하고 11월 23일에는 일본군이 호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하였다. 반격에 나선 일본군을 11월 24일 후치령에서 다시 한번 격퇴하는 전공을 달성했다. 12월 15일에는 일본군의 군용 물자 수송대를 습격하여 물자를 획득하였다. 일본군이 토벌대를 편성하여 공격해오자 12월 3일 중평장(仲坪場)에서 혈전(血戰) 끝에 물리쳤다.
이에 일본군은 북청·함흥(咸興)·성진(城津)의 3개 수비대로 1개 대대를 편성하고 1개 기병 소대까지 포함하여 ‘대토벌대’를 편성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8년 1월 10일 갑산을 기습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고, 우체국 등 일제 기관을 파괴하였다. 이후 이원(利原)·단천(端川)·풍산(豐山)·갑산·혜산진(惠山鎭) 일대의 산악 지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타격하였다.
거듭된 패전에 일제는 홍범도 부대에 대한 회유 공작을 진행하는 한편, 그 가족을 인질로 귀순 공작을 시도했다. 일제는 1908년 3월 29일 북청군 인창사(仁昌社)에 피신하여 있던 홍범도의 부인 단양이씨를 체포하여 의병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자 했고, 홍범도를 귀순시킬 것을 종용하였다. 단양이씨는 취조와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비밀을 지켰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폭도(暴徒)에 관(關)한 편책(編冊)(경무국)
- 홍범도 장군: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반병률, 한울아카데미, 2014) 54, 59~60, 24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