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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1748
성명
한자 高濟夏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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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년도 2006 훈격 대통령표창
1943년 여름 이후 안동농림학교 동급생 윤동일(尹東一)이 조직한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回復硏究團)에 가입하여 1945년 3월 10일 안동경찰서 안동파견헌병대를 기습 공격하여 파괴하려다가 체포되어 1945년 8월 16일 기소유예(起訴猶豫)로 풀려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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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경북 안동농림학교 임과(林科) 8회생으로서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回復硏究團)의 단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은 안동농림학교 8회생들이 일제에게 빼앗긴 주권을 탈환하고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고자 조직한 단체였다. 1945년 4월경 연합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을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단원들은 이때 일제의 전력이 분산될 것을 이용해 국내에서의 무장 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 계획의 수행을 위해 국내외의 정세를 입수 분석하는 참모부, 일본인의 동태를 파악하는 조사부, 단원 및 동지를 포섭하는 교화부, 악질 일본인을 조사하는 신풍부(神風部), 경찰서·헌병대의 무기고를 조사하는 특공부(特功部) 등의 부서를 두었다.

고제하는 졸업 후 전매국 출장소에 다니면서 동지 규합과 일반 대중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1945년 3월 10일 안동경찰서와 안동파견헌병대를 기습 공격하여 파괴하려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안동농림학생항일약전(안동농림고등학교동창회, 1978)
  • 안동독립운동가 700인(김희곤, 2001) 56, 79, 384면
  • 刑事事件簿(法務部, 1945)
  • 安東農林50年史(安東農林50年史編纂委, 1983) 18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고제하 - 경상북도 안동(安東) -
본문
1927년 2월 20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안동면(安東面) 율세동(栗世洞, 현 안동시 북문동)에서 태어났다. 1940년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에 8회 입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임과(林科) 재학 중 비밀결사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回復硏究團)에 참여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재학 당시 전시체제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근로봉사에 동원되는 일이 잦았다. 같은 학교 학생이 징병을 기피하다가 징계를 받거나 항공병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군사 동원을 위한 비상조치로 수업연한도 단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희생되기보다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43년 7월 여름방학 중 관솔 채취에 함께 동원되었던 권영동(權寧東)·서정인(徐正寅)과 일본의 패전 전망 및 군사 동원이 확대될 것이라는 의견을 공유하고 항일 활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1943년 가을부터 서정인의 집과 낙동강 제방 등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지를 모았다.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조국의 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고민하였다.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상황 및 태평양전쟁 전황 등 국외 정보를 청취하였다. 8회 입학생의 졸업이 1944년 12월로 예정되자 졸업 전 구체적인 활동 방안을 모색하고 조직을 만들자고 합의하였다. 1944년 10월 말에 8·9회 입학생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웠다. 비밀결사의 명칭은 결성 초기 회복연구단 또는 조선회복연구단 등으로 불렀다. 후에 한국의 독립을 기필코 이루자는 의지와 청년이 독립 방책을 연구해 실행하자는 의미를 담아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안전을 위해 점조직으로 단원을 모집하였다.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는 50여 명의 안동농림학교 8·9·10회 입학생과 경주중학교 학생, 사회인 등이 참여하였다.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며 조직을 확대하다가 적당한 때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일제기관을 파괴하는 등 후방을 교란해 연합군의 상륙을 유리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무장봉기 시에는 어두운 밤을 틈타 안동경찰서와 헌병파견대 무기고를 습격해 장악하고 교통·통신시설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봉기를 선동하는 벽보를 제작해 붙이고 확성기로 방송을 하는 등 일반인들을 무장봉기에 동참시킬 계획도 세웠다. 거사에 성공하면 일부는 의성 방면으로 이동해 대구에서 출동하는 일본군 부대와 교전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1944년 12월에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무장봉기 날짜가 결정되면 졸업 후에도 동참하기로 하였다.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은 1945년 2월 17일에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부터 고등계 형사의 사찰이 심해지며 단원 일부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거사 계획을 3월 10일로 연기하였으나 무장봉기 계획이 노출되었다. 경북도경과 안동경찰서가 연합해 단원들을 추적하였다. 3월 초에 단원 전체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1945년 3월 10일에 안동 전매지청(專賣支廳)에서 체포되어 대구감옥 안동분감(안동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심문을 받으며 재판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단원들과 함께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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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멸실 묘소가 재난 등에 의해 사라진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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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항일 기념비 경상북도 안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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