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평남 성천군(成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김종석은 1919년 3월 2일 오전 11시 성천군 천도교구의 교인과 일반시민 등 약 2,000명이 모인 자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읍내 일본헌병대를 향하여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 도중 22명이 일본 헌병 및 보조원 등 10여 명이 쏜 총에 맞아 죽고, 7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오후에 시위 진압을 위해 평양으로부터 수비대 1개 중대가 파견되면서 시위대는 하오 6시경 해산하였다. 성천군의 독립만세시위는 3월 4일에도 계속되어 30여 명이 사살되고 3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300여 명이 체포될 만큼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김종석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수개월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 친구와 합자하여 농민사(農民社)를 만들어 농민운동을 전개하다 황해도 신막(新幕) 헌병분견소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11월에 가택을 수색당한 후 성천경찰서에 연행되어 23일간 유치당하여 태형(笞刑) 90도(度)를 받았다.
김종석은 1920년 6월 대한국민회 성천지회에 소속되어 동회의 조직 확장과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국민회 성천지회에서는 의연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였으며, <독립신문>과 <경고문> 등을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성천경찰서는 6월 16일 김종석을 포함해 군내 주요 인사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종석도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史(金承學) 上권 187면, 下권 125면
- 昭和思想統制史資料-中國政勢編-제24권 195면
- 北支地方要視察朝鮮人槪況(司法省刑事局:1940. 2월) 6·13·33면
- 成川郡誌(成川郡誌編纂委員會, 1989) 648면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제4권 341면
- 管內狀況 및 警察事務統計報告書(在石家莊日本領事館警察署, 1939) 77면
- 東亞日報(1920. 7. 8)
- 朝鮮日報(1920. 6. 28)

